역사속에 오늘, 5월/5월 15일

신라 문무대왕 해중릉(수중릉) 발견

산풀내음 2017. 3. 29. 21:10

1967 5 15,

신라 문무대왕 해중릉(수중릉) 발견

 

1967 5 15일 경북 경주시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약2m 앞바다에 있는 대왕바위에서 바닷물 속에 지어진 문무대왕릉이 발견됐다. . 1967 7월 24 대한민국의 사적 158호로 지정되었다.

 

 

둘레 약 2m의 대왕바위에 정확한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수로를 깎아내고 그 중앙에 패진 4평 가량의 해중 못에 해중릉이 조영되어 있다. 유골은 그 못 안 석함속에 안치된 것으로 보이며, 그 위에 길이 3.59m, 두께 0.9m의 큰거북 모양의 화강암 개석이 덮였다.


이런 릉의 조영방식은 사문을 배치하고 그 중에 사리를 안치한 기원전 2세기의 `산치`탑을 위시해 5, 6세기 중국육조시대의 목탑 그리고 신라의 봉황사탑, 백제의 미륵석탑 등의 양식과 비슷하다. 문무대왕은 "내가 죽으면 서국(인도) 식으로 화장을 하여 동해에 장사를 하라. 그러면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으리라."는 뜻의 유언을 했었다.

 


 

문무왕은 신라 제30대 왕(재위: 661~ 681)이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둘째누이인 문명왕후의 맏아들로서 휘는 법민(法敏)이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681년에 승하했다고만 기록했을 뿐, 그의 출생 년도가 정확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문무대왕비’에 적힌 내용을 따르면, 왕이 승하할 당시의 나이가 56세였다고 기록하였으므로, 626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문무왕은 무열왕 7(660)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전쟁 중일 때, 외숙부인 김유신을 따라 5만의 병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무열왕 8(661) 부왕이 승하하고, 곧 즉위하게 된다. 즉위 직후, 661년에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당에 물자보급로를 확보하고, 고구려 공략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으며, 664년엔 백제 부흥군의 최후 방어선인 사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멸망케 하였다. 그 해 가을부터 고구려 정벌에 대대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고, 668년에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왕인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문무왕 10(670)에는 당과의 전쟁을 벌였다. 671년에는 백제영토에 설치된 웅진도독부를 침공하여 빼앗고, 백제의 전 영토를 점령하였다. 673년에는 당의 침략에 대비해 전방지역에 대대적으로 성을 쌓았고, 676년에는 당과의 마지막 전쟁인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하여 삼국통일을 이루어 냈다.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5년 뒤, 6817월에 서거하였다. 서거직전 지의법사를 불러 당부하기를, 자신이 죽으면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될 터이니, 화장을 하여 동해바다에 묻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하들과 태자에게 앞으로 신라가 이루어야 할 업적과 당부를 유언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유조에 따라 시신은 화장하였고, 경주 감은사 동쪽 바다 대왕암 위에 장사하였다.

 

경주 감은사지

 

문무왕을 장사 지낸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라 하며, 해중왕릉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또한 왕릉에 수로를 만들어서 바닷물이 고이지 않고, 드나들 수 있게끔 하였다. 문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신문왕은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감은사라는 절을 지었다. 한 일설에 의하면, 감은사 대문 밑에 구멍이 뚫려있는데, 그것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를 마음대로 오고가게 끔 통로를 만들어 준 것이라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