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15일

미국, 27년 만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

산풀내음 2017. 3. 29. 21:16

1972 5 15,

미국, 27년 만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

 

 

1972 515 0, 사이렌과 기적소리가 일본 오키나와(沖繩) 전역에 울려퍼졌다. 27년간의 미국 통치에서 벗어나오키나와현()’이라는 새로운 출발을 자축하기 위해서였다. 오키나와현 지사는오키나와라는 영원한 새 생명의 탄생이라며 감격해 했지만 진보진영은 핵과 미군기지없는 전면반환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럼에도 반환은 예정대로 진행돼 국제선은 국내선이 됐고 우측에서 달리던 차량은 좌측으로 달렸다.

 

1972 5 15일 도쿄 무도관에서 개최된 오키나와 반환 기념식전에서 문서를 교환하는 애그뉴 미 부통령과 사토 일본 총리. 히로히토 일왕 부부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Ceremony commemorating return of Okinawa to Japanese control, May 15, 1972

 

구 일본 제국은 1945 8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며 멸망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로 일본국이 독립했으나 몇몇 전략적인 도서 지역은 미국의 신탁 통치에 맡겨졌다. 아마미 군도, 오가사와라 제도, 그리고 오키나와가 그곳이었다.

 

아마미 군도는 1953, 오가사와라 제도는 1968년에 미국으로부터 일본으로 반환됐으나, 미국은 오키나와의 반환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1854년 미국은 오키나와를 다스리던 류큐 왕국과 미류 수호 조약을 맺은 적이 있었다. '원래 일본과 류큐는 다른 나라'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오키나와에 고등 판무관을 두고 류큐 자치 정부를 구성해 행정 주석과 입법의원을 선거로 선출하도록 했다. 자치령 괌과 같이 통치할 요량이었다.

 

미국이 이처럼 오키나와에 주목한 이유는 그 전략적 가치 때문이기도 했다. 오키나와는 일본 도쿄에서 1500, 서울에서 1400, 구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에서 2000, 필리핀 마닐라에서 1450, 베트남 사이공에서 2600, 중국 상하이에서 800, 베이징에서 1800㎞ 거리에 있는,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전략적 요지였다.

 

류큐(琉球) 왕국이라는 독립국가로 한국, 중국, 일본, 동남아를 연결해 온 해상무역 중심지 오키나와가 일본령이 된 것은 1609년 가고시마(鹿兒) 영주가 이곳을 복속한 뒤부터였다.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으로 정식 편입됐지만 일본 본토로부터는 언제나 버려진 섬이었다.

 

종전을 앞둔 1945 4월부터 석달간 미군과 일본군 간에 벌어진 오키나와전투(Battle of Okinawa)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전투로 미군 15000명과 일본군 6 5000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주민들도 12만 명이나 희생됐다. 본토방어를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한옥쇄작전때문이었다. 일본의 총알받이였던 것이다.

 

6 23일 사령관의 자살로 전투는 막을 내렸지만, 바다에서 쏘아댄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으로 초토화되면서 석회암 동굴에 숨어 최후 저항을 하거나 주민을 몰아 넣고 집단자결을 강요했었다. 실지로 요미탄손의 피난지였던 치비치리 동굴에서는 미군이 상륙하면 온갖 치욕스런 죽음을 당하게 된다며 모녀를 비롯해 집단 자결하게 했다.

 

The battleship USS Idaho shells Okinawa on 1 April 1945.

A U.S. Marine Corps Stinson Sentinel observation plane flies over the razed Naha, capital of Okinawa, in May 1945.



Okinawa residents, many of them wounded, surrender in June 1945

Suicide Cliff where thousands of Japanese commited suicide, soldiers and civilians.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하며 애초에는 미국의 통치에 기대감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으로 냉전이 첨예화하며 미국이 오키나와의 군사기지화에만 관심을 갖고, 또 미군 범죄가 빈발하자 이러한 주민들의 기대는 실망으로 돌변했다. 오키나와가 미국령임에도 주민들이 미국 헌법에 의한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며 미국 상·하원에 대표자를 보내거나 미국 대통령 선거에 선거인단을 보낼 수도 없는 등 참정권이 전혀 없었던 점도 한몫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본토 복귀파', '미국령 유지파', '류큐 독립파' 등으로 삼분돼 대립하기 시작했다.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등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베트남 전쟁의 종전을 공약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오키나와를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는 "전쟁에 의해 빼앗긴 땅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돌려받는 것은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자화자찬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재정난에 빠져 있던 미국 정부는 오키나와를 반환하는 대신 오키나와에 건설한 수도·전기·공항·관공서 등 사회간접자본 비용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일견 무리한 요구였지만 일본 정부는 이에 응해 32000만 달러를 미국 정부에 지불했다.

 

'반환'되어 '본토 복귀'하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국 헌법의 적용을 받게 됐고 참정권을 획득했다. 일본을 오갈 때 여권이 필요 없어지고 통화가 엔화로 통합되었으며 전화·우편에 국제 요금이 청구되지 않는 등의 변화는 좋았다. 그러나 구 일본군의 자살 강요 등을 겪었던 주민들은 자위대의 배치를 반대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오키나와에 자위대를 배치했다. 또한 차량의 통행을 일본 본토에 같은 좌측 통행으로 변경할 것을 강요해 극심한 혼란을 야기했다. "어차피 본토와는 도로로 연결되지도 않는 데 어째서냐"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의견은 무시됐다.

 

결정적으로 오키나와 본섬 면적의 약 20%를 차지하는 미군 기지에 대해 일본 본토 정치인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특히 후텐마 기지 이전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던 민주당의 하토야마 내각이 당선 직후 이를 번복한 사건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본토 정치인들에 대한 극도의 환멸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