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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독립운동 도운 영국 탐험가 토머스 로렌스 사망

산풀내음 2017. 4. 5. 20:23

1935 5 19,

아랍 독립운동 도운 영국 탐험가 토머스 로렌스 사망

 

누구나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밝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반면에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몹시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눈을 활짝 뜬 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행동한다. 그렇다. 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

 

- 토마스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머리말에서 - 

 

1927, 아랍 전통 복장을 입고 단컴을 찬 로렌스의 모습

 

1차대전이 발발하고 600년 제국 오스만 투르크가 꺼져가는 생명 연장을 위해 독일과 연합하자 영국은 오스만 지배하에 있던 아라비아의 하심가()와 협정을 맺어 아랍인이 독립운동에 나서면 지원하기로 약속한다. 하심가의 후사인이 봉기한 것은 1916 6.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1888 8 15~ 1935 5 19)도 영국군 장교로 파견된다.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로렌스는 고고학자로 이미 3년 반 동안 중동지역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던, 이를 테면 중동 전문가였다. 로렌스의 아라비아와의 직접적인 인연은 1909년 대학에서의 마지막 여름방학 때 시작되었다. 그는 졸업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진행 중이던 고대 히타이트 문명의 발굴 사업을 견학하기 위해 아라비아 여행을 계획했다. 스승인 호가스 박사는 여름에는 여행하기 좋지 않다며 반대했지만, 로렌스는 휴대품이라고는 카메라와 권총, 칫솔만 챙기고는 이웃 마을에 놀러 가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로렌스가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1917 7월 홍해의 요충지 아카바를 점령하면서였다. 로렌스는 오스만군이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기습작전을 감행한다. 50여명의 아랍군을 이끌고 6주 만에 1000km나 되는 사막을 가로질러 아카바의 배후를 친 것이다. 오스만의 사상자와 포로가 1200명에 달했지만 아랍군의 희생자는 2, 일방적인 승리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순간이었다. 로렌스는 특히 게릴라전에 능해 1년 반 동안 79차례나 철도를 폭파하는 탁월한 전과를 거뒀다.

 

로렌스의 아랍 독립에 대한 열정은 단지 전략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진정으로 아랍을 사랑했다. 그는 기꺼이 영국 군복을 벗어던지고 아랍인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로렌스의 진정한 마음이 아랍인들에게 전달되었기에 그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터키군과 싸울 수 있었다.

 

엔부에 들어서는 파이살 이븐 후세인의 군대()
1917
년 열차 폭파 후 현장에 선 로렌스(), 1918 10월 다마스쿠스에 들어서는 로렌스()

1918년 어느 날

 

그러나 고독한 싸움이었다. 영국이 프랑스와 중동지역을 분할통치하기로 비밀협정을 체결하고 또 유태인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18 11 11일 휴전이 된 후, 각국의 이권을 계산하는 평화회의가 진행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국주의의 욕망을 드러냈다. 로렌스는 아랍의 일은 세계 어느 나라도 간섭하지 말자고 주장했으나, 그 주장이 먹힐 리가 없었다. 결국 몇 달에 걸친 밀담 끝에, 파이살은 프랑스의 원조를 받으면서 다마스쿠스를 거점으로 하는 시리아의 내륙지방을 차지하게 되었고, 프랑스는 베이루트와 시리아 해안 지방을 손에 넣었으며, 유대인들은 영국의 보호하에 팔레스타인 지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상적인 결말을 꿈꾸었던 로렌스는 깊은 환멸을 느꼈다. 그는 조지 5세에게 받은 훈장을 반납하면서, 자신은 아랍인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불어넣었다며, 아랍 반란에서의 자기 역할은 자신에게나 영국에게나 불명예스러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로렌스가 아라비아를 떠날 때 그의 몸에는 9군데의 총상, 33번의 골절상, 7차례의 비행기 사고 등으로 상처투성이였지만 정작 그를 괴롭힌 것은 강대국의 탐욕이었다. 그는 서서히 자기 분열증세에 빠져들었다. 귀국 후 모든 정치적인 보상을 뒤로하고 사병으로 입대했다. , 30세에 대령이었던 그는 35세에 계급을 낮추어 사병이 되었다. 1922 8월 존 흄 로스라는 가명으로 공군에 입대한 것이다. 이듬해 2월 신분이 밝혀져 제대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직 로렌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3월에는 다시 토마스 에드워드 쇼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육군 전차부대에 입대했다.

 

그는 왜 이렇게 군대로 돌아가려 했을까? 허울 좋은 명성만 무성한아라비아의 로렌스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름을 바꾸고 군대에 있으면, 복무기간 중에는 조용한 생활이 보장되리라 생각했다. 이 시기에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나에겐 살기 위해 싸울 기력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예전의 로렌스와는 헤어졌습니다. 세상의 소문이라는 것이 만들어놓은 그 로렌스를 생각만 해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군대로 피신하고 싶은 소원을 정부도 들어주었다. 1925 7월 공군 복귀가 허락된 로렌스는 1935 2월 말까지 10년의 병역 만기를 채우고 제대했다. 이제 그를 귀찮게 하는 요소는 없어졌다. 새로운 이름으로 로렌스는 마음껏 은둔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20세기 가장 특별한 괴짜이자 영웅이었다. 그의 영웅적인 행위는 결국 제국주의에 이바지하고 말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이상을 꿈꾼 몽상의 결과였다. 그의 회고록 <지혜의 일곱 기둥>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지만, 그 회고록은 자신이 결코 영웅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도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것은 아랍 운동의 역사가 아니라, 그 운동에 참여했던 나의 역사이다. 일상생활과 사소한 사건들과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어떤 교훈도 담겨 있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만한 놀라운 폭로도 없다.” 그랬다. 이렇듯 그는 자기 자신의 업적에 대해 사실상 냉소적이었다.

 

1935 5 19, 오토바이 사고로 영광과 비극의 인생도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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