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6일

위안스카이 사망

산풀내음 2017. 5. 1. 17:17

1916 6 6,

위안스카이 사망

 

손문의 입, 황흥의 두다리도 위안스카이 뱃속의 꿍꿍이는 따라잡지 못하네.” (20세기 초 중국 민간에 유행한 노래가사). 이렇듯 거대한 땅 중국을 통치하려는 야망을 품었던 그가 1916 6 6, 제제(帝制)의 부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만성 피로와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 출신으로 위안바오중(袁保中)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위안바오중은 친동생인 위안바오칭(袁保慶)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위안스카이를 양자로 보냈다. 위안스카이(袁世凯, Yuan Shikai, 1859-1916)는 도통 공부에 취미가 없었고, 대신 말 타기를 좋아하고 무예를 열심히 익히는 등 문()보다 무() 쪽으로 지나치게 열정을 보였다.

 

양아버지 위안바오칭의 추천으로 이홍장(李鴻章)의 참모인 우장칭(吳長慶)의 휘하로 들어갔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조정은 우장칭에게 6개의 부대를 이끌고 출병할 것을 명령했고 위안스카이는 그의 휘하로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임오군란의 수괴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는데 위안스카이는 우장칭을 도와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텐진에 연금함으로써 활약을 펼쳤다.

 

이 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때 25살의 풋내기 장교 위안스카이는 이들의 세상을 ‘3일 천하로 만들어 버렸다. 그 공을 인정받아 1885 26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을 쥐락펴락하는 감국(監國)으로 올라섰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밀려날 때까지 그는 국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면서 조선을 실질적으로 중국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청일전쟁으로 중국으로 쫓겨 간 후 1898광서제와 캉유웨이(강유위)가 주도하는 무술변법에 협조하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대부에게 이를 밀고하면서 수구파에게 정권을 넘기는 데 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이 결과 광서제는 유폐 당하였고 이후 38세의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그런데 2008년 광서제의 머리카락을 조사한 결과 다량의 비소가 발견되면서 독살로 밝혀졌다.

 


광서제()와 아버지인 제1의 순친왕

 

광서제의 유폐 이후 서태후의 총애를 얻게 되었고, 1899년부터 1901년까지의 의화단 사건 기간에는 의화단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한동안 청의 외무부 총리교섭통상대신이었으나, 청의 마지막 구심점이던 서태후(西太后, 1835~1908)가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 죽게 되자 이후 압박에 의해 낙향하게 된다.

 

서태후의 죽음과 관련하여 청나라 말기 중국에서 생활한 영국인 에드먼드 트렐로니 백하우스(1873~1943)만주국의 몰락(중국판 제목은 태후와 나)에서 서태후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908 1115일 아침 서태후는 베이징 황궁의 접견실에서 위안스카이 등 두명의 원로대신을 접견했다. 두 사람은 서태후에게 퇴위를 요구하면서 자신들을 젊은 황제(‘마지막 황제’ 푸이)의 섭정인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화가 치민 서태후가 두 사람을 모반죄로 기소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 위안스카이는 리볼버 권총을 꺼내 서태후의 복부를 향해 3번 방아쇠를 당겼다. 서태후는 흥건하게 피를 쏟은 채 두 사람을 참수하라고 요구하며 최후를 마쳤다. 서태후를 시중들던 환관들은 통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11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당시 청조의 요청으로 정계에 다시 진출하니, 오늘날 국무총리급에 해당되는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속으로는 청조를 타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단 신해혁명군의 세력을 꺾는 선에서 상황을 멈춘다. 1912 1, 위안스카이는 공화파의 쑨원(손문)과 협상 테이블에 앉고 간단한 조건을 내건다. 자신이 청조를 버릴 테니 쑨원이 가지고 있는 혁명정부 대총통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 쑨원은 공화국을 건설할 것과 수도를 난징으로 바꿀 것이라는 두 조건을 요구했고 협상은 타결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 있는 심복 돤치루이(단기서)에게 황제퇴위를 준비시켰고, 그의 군대가 자금성을 점령하자 같은 해 2 12일 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퇴위시켰다. 이로서 청조는 멸망하고,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자리에 취임하며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1912: Yuan Shikai, the dictator who after the revolution of 1911, became the first President of China, is viewed with his colleagues immediately following his inauguration

 

하지만 제위의 욕망이 있던 그는, 만년에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하여 중화제국 제제운동 (帝制運動)을 일으켜 칭제를 감행하였으나, 중국 전체에서 "토원(討袁)"의 깃발이 세워지자 이내 제위를 포기한다. 이후 얼마 안가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이 제제운동은 지방 군벌의 세력이 중앙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군벌 세력으로 움직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총 32(17 15)의 자식을 두었다. 부인은 하나지만 이타이타이(혼례를 올리지 않고 한 집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부인) 9명 두었다. 이타이타이 9명 중 3명이 조선인이었다.




中 마지막황제 꿈꿨던 위안스카이, 조선인 첩 3명 뒀다

 

경향신문 2006 11 15일 기산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11150818131&code=970204


중국의 마지막 황제를 꿈꾸던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는 정실 1, 9명을 두었고 첩 가운데 3명이 조선인 인것으로 밝혀졌다. 첩살이를 한 조선의 여인들은 기구한 운명이었지만, 조선인 피를 받은 위안스카이의 손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세계적인 핵물리학자로 성장했다.

 

13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중국측 사료에 따르면 위안스카이는 23세때인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왔다가 1885년 ‘조선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 전권대표’로서 1894년 청일전쟁 직전까지 9년 동안 조선의 최고 권력가로 군림하며 세도가인 안동 김씨 처녀를 첩으로 맞아들였다. 김씨는 1890년 위안스카이 둘째 아들인 커원(克文·1890~1931)을 낳으면서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그런데 위안스카이가 1894년 청나라로 귀국한 다음에 문제가 생겼다. 김씨가 결혼할 당시 수행한 몸종으로 이씨와 오씨 2명이 있었는데, 위안스카이는 첩은 많을수록 좋다며 이들 몸종도 첩으로 편입한 것이다. 그는 나이 순서대로 첩의 순서를 매겨 몸종인 이씨를 2번째 첩, 안동 김씨를 3번째 첩, 몸종인 오씨를 4번째 첩으로 정했다. 위안스카이는 이들 조선인 3명에게서 모두 15(78)의 자식을 얻었다. 위안스카이 슬하의 자녀 32(1715)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 셈이다.

 

안동 김씨가 받았던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그녀는 정실의 위치까지 은근히 바라봤지만 자신의 시중을 들던 몸종이 자신과 같은 위치인 첩이 된 데 대해 무척 언짢아하면서 내내 울적한 세월을 보냈다. 특히 자신이 낳은 첫 아들 커원을 위안스카이가 자식이 없는 쑤저우(蘇州) 기생 출신의 첫번째 첩 선()씨에게 키우라고 넘기면서 심리적 충격은 더 커졌다.

 

김씨의 몸종 오씨는 13녀를 낳았지만 위안스카이가 직예총독(1901~1907) 시절 산욕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이씨는 다섯째 아들 커취안(克權)을 비롯해 총 42녀의 자녀를 낳아 행복한 편이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직후 유족들이 위안스카이의 활동 근거지였던 톈진(天津)으로 거처를 옮긴 점에 비춰볼 때 안동 김씨와 몸종 이씨도 톈진에서 노년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위안스카이는 17명 아들 가운데 안동 김씨가 낳은 둘째 아들 커원과 이씨가 낳은 다섯째 아들 커취안을 가장 총애했다. 황제에 즉위한 뒤 후사를 이들 가운데 한명을 골라 물려주겠다고 생각했다. 반면 정실 위()씨 부인이 낳은 맏아들 커딩(克定·1878~1958)은 독일과 영국에 유학을 다녀온 자신이 대통을 이어야 한다고 여겼지만 1913년 승마를 하다 떨어져 한쪽 다리를 저는 바람에 후사 경쟁에서 탈락했다.

 

위안스카이의 총애를 받았던 안동 김씨 소생인 커원은 부친의 황제 즉위에 반대하면서 1916년 황제 즉위를 앞두고 다른 형제들이 요란스럽게 행사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 잠적해버렸다. 그는 부친이 황제 즉위 불과 83일 만에 요독증으로 세상을 떠나자 상하이에서 골동품 거간꾼으로 연명하다가 31년 톈진에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장쉐량(張學良) 등과 함께 ‘중화민국 4대 공자’로 꼽히며 풍류를 즐겼던 위안커원의 셋째 아들이 바로 세계적인 물리학자였던 위안자류(袁家류·1912~2003) 박사다. 그는 30년 옌징(燕京)대학을 졸업한 뒤 36년 중국 주재 미국 대사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딴 뒤 프린스턴 대학 등에서 연구원을 하면서 기초물리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위안자류 박사의 부인은 컬럼비아대에서 학위를 한 우젠슝(吳健雄·1912~1997) 박사로, 여성으로 유일하게 미국이 원자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바 있다. 이들 부부의 외아들인 위안웨이청(袁緯承·59) 박사는 현재 미국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 연구원으로 부모의 뒤를 이어 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73년 위안자류 박사가 부인과 함께 중국 대륙을 다시 찾았을 때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총리는 위안 박사의 집안 내력을 거론하면서 “박사 집안은 대를 내려갈수록 진일보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