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6일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작전(Normandy Landings) 시작

산풀내음 2017. 5. 1. 17:25

1944 6 6,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작전(Normandy Landings) 시작

 

6 6일 새벽 1 30, 미군과 영국군의 공수부대가 낙하하는 것으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 개시되었고, 6 30, 서서히 동쪽 하늘이 밝아 올 무렵 해상에서 대기하던 연합군 함대의 함포 사격이 시작된다. 함선 1200, 항공기 11000, 상륙주정(舟艇) 4,126, 수송선 804, 그리고 수륙(水陸)양용 특수장갑차 수백 대로 편성된 대부대가 악천후를 뚫고 프랑스 노르망디 앞바다에 나타난 것이었다. 작전명오버로드(Overlord: 대군주)’로 명명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이날 연합군은 미군 7 3,000, 영국·캐나다 합동군 8 3,000, 그리고 자유프랑스군, 호주군, 폴란드군, 노르웨이군 등 8개국에서 온 총 15 6,000명의 병력을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켰다. 이 중 13 2,500명은 선박 편으로 영국해협을 건넜고 2 3,500명은 공중 수송되었다.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여 처절한 싸움을 계속하던 스탈린은 영국과 미국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여 제2전선을 구축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1943 11월 말 테헤란 회담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스탈린은 1944 5 1일까지 북프랑스에 연합군이 상륙하여 제2전선을 구축할 것을 확약했다. 오버로드 계획이 처음 윤곽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연합군은 상륙지점으로 파 드 칼레, 노르망디, 브리타니, 네덜란드 해안 등을 검토했는데, 이 중에서 비교적 방어가 허술한 것으로 판단된 노르망디 해안이 최종 상륙지로 선정되었다. 원래 D 데이는 6 5일이었으나 이틀 전부터 영국해협의 기상상태가 악화되자 작전이 24시간 연기되어 6 6일 오전, 상륙이 감행된 것이다. 그러나 이날도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아 노르망디 해안가에 구축되어 있던 독일군의 벙커와 요새 시설을 항공 공격을 통해 무력화시키는 데 실패함으로써 상륙군이 큰 피해를 당하게 된다.

 

1943 12월 상륙작전을 실행할 연합원정군 사령부 (SHAEF, Supreme Headquarters of Allied Expeditionary Forces)가 구성된다. 상륙작전을 지휘할 총사령관에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임명되었고, 지상군은 ‘몽고메리’ 장군, 해군은 미국의 ‘램지’ 제독, 공군은 영국 ‘레이 멜러리’ 장군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직책과 작전 범위를 놓고 미군과 영국군 간에 신경전이 있기도 했지만, 탁월한 조정자였던 ‘하이젠하워’는 원만한 타협을 이끌어 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하루전인 1944 6 5일 美 제101공정사단 506연대 2대대 `이지 중대`(Easy Company)소속의 대원들을 격려하는 아이젠하워의 모습.

 

연합군은 1944년 봄부터 교량과 도로, 철도에 대한 대대적인 공중 폭격을 통해 독일군의 병력증강을 억제하는 작전을 펼친다. 또 상륙 목표를 숨기기 위한 기만작전을 병행한다. , 독일군으로 하여금 연합군의 상륙지점이 노르망디가 아니라 도버 해협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파드칼레’ 지역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중폭격기들은 칼레 앞바다를 비행하면서 방대한 양의 금속 파편을 살포하여 이 지역에 대규모 연합군이 상륙하는 것처럼 독일군 레이더를 교란시켰다. 기만 작전에 속은 독일군은 기갑부대를 칼레 방면에 배치했는데, 이로써 노르망디 상륙군은 독일군 기갑부대의 강력한 저항을 피할 수 있었다.

 

한편 독일의 히틀러는 1944년 봄부터 영국 남부 해안에 수십만 명의 연합군이 몰려들고 다량의 무기와 탄약, 보급품 등이 쌓이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상륙지점을 예측하는 데 골몰한다. 상륙일자도 오리무중이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대서양 지역 방어를 책임진 독일군 방어총사령관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였고, 대서양 해안방어 총책임자는 아프리카에서 맹위를 떨쳤던 에르빈 롬멜 원수였다. 그런데 상륙 저지 역할을 수행해야 할 롬멜은악천후로 연합군이 1주일 이내에는 상륙할 수 없다며 전선을 비우고 생일을 맞은 아내 품으로 달려갔다. 당초 6 5일로 예정됐던 상륙이 하루 연기될 정도로 1944 6월은 25년 이래 최악의 악천후를 기록했다.

 

()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1944)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1875 ~ 1953)

 

1944 6 5일 자정부터 6 6일 이른 새벽까지 2316대의 수송기와 수많은 글라이더를 이용하여 1 7000여 명에 이르는 미군 제 82·101 공수사단과 영국군 공정대, 자유프랑스군 소속 병사들이 프랑스에 침투했다. 이어 아침 일찍 연합군 공격부대가 노르망디 해안 5곳을 향해 상륙을 감행했다. 80㎞에 달하는 노르망디 해안에 일사불란한 상륙을 하기 위해 연합군은 작전 구역을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소드 등 5곳으로 나누어 부대를 배치했다.

 





 

그런데 유타, 골드, 소드 해안은 비교적 손쉽게 상륙에 성공했으나 오마하 해안은 상황이 심각했다. 오전 6 45분경 미 육군 1사단과 29사단 병력은 레인저 9개 중대와 함께 미국과 영국 해군의 함포 지원을 받으면서 노르망디 해안에 서쪽에 위치한 8㎞의 해안(암호명 오마하로 명명)에 상륙을 개시했다.

 

오마하 해안 상륙부대는 거친 파도와 조류에 떠밀리고, 아군들의 엄호를 위해 연막을 터뜨리는 바람에 상륙정들이 당초 목표지점보다 훨씬 동쪽으로 떠밀려 상륙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미군이 상륙한 지점은 해안가에서 100~200m 떨어진 깊은 수심이었다. 게다가 독일군이 중기관총과 포대, 그리고 철제·목재 바리케이트, 지뢰를 대대적으로 구축해 놓은 코앞에 맨몸으로 상륙부대가 던져진 꼴이었다.

 

당시 노르망디 해안을 방어하는 독일군은 716보병사단과 352사단이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하기 위해 프랑스 해안에 총 420만 개의 지뢰와 52만 개의 수중 장애물, 3 1000개의 수중 기뢰를 설치했다. 특히 해안 방어를 위해 구경 406㎜의 초대형 대포를 비롯하여 4호 전차를 콘크리트로 고정시킨 후 포탑이 빙빙 돌아가는 전차포를 해안포로 사용했다.

 

오마하 해변 방어를 담당한 독일군 352사단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과 격전을 벌였던 역전의 노장들이 다수 포함된 부대였다. 미군들은 바로 이 독일군 352사단 병력들의 집중 표적이 되었다. 영화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이 바로 6 6일 오전 오마하 해안에 상륙하여 독일군의 공격을 받는 미군들의 생지옥 같은 상륙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마하 해변 상륙부대의 선봉이었던 미 29보병사단 16연대 3대대 2중대원의 경우 198명이 상륙했으나, 불과 4 30초 후 196명이 전사(戰死)하고 단 2명만 생존했다.

 

당시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은 독일군이 자랑하는 MG 42 기관총이었는데, 이 기관총 때문에 혼쭐이 난 미군들은히틀러의 전기톱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당시 오마하 해변의 독일군 방어진지에서 MG 42 기관총 사수로 근무했던 21세의 하인리히 세블로흐 하사는 약 9시간 동안 2,000여 명의 미군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혀오마하의 야수(野獸)’(Beast of Omaha)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는 전투 과정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5만여 명이 상륙한 오마하 해변에서 단 하루 동안 3,000여 명의 미군들이 독일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전사했는데, 그것은 집중 공격이라기보다는 차라리대학살이나 다름없었다. 오전 내내 상륙지에 꼼짝없이 갇혀 있던 오마하 상륙부대는 연합군 해군의 전함과 구축함들의 함포사격에 의해 겨우 숨통이 트였고, 함포 지원을 받으며 상륙한 미군들에 의해 1200명의 독일군이 사살되고, 기관총 진지들을 하나하나 파괴하면서 오마하 해변은 저녁 무렵 완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오마하와 주노 해안의 참극에 비하면 유타 해안 상륙부대는 천우신조(天佑神助)를 만났다. 유타 상륙부대도 거친 파도와 조류에 떠밀려 목표 지점보다 훨씬 동쪽에 상륙했는데, 마침 상륙지점이 독일군의 방어가 허술한 곳이었다. 덕분에 미 7군단 휘하의 4사단과 90사단, 영국군 2군은 불과 197명의 희생자만을 낸 채 손쉽게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Paratroopers get final instructions before leaving for Normandy.


Wounded Canadian Soldiers on Juno Beach D-Day



 

흥미로운 사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유타 해변에 상륙한 미군이 독일군 포로를 잡았는데, 그 중 4명이 한국인이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던 네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양근정 씨는 1920 5 3일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1938 18세 때 일제 관동군에 징집된 그는 노몬한 전투에 참전했다가 소련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그는 조선에서 끌려온 신분이라는 점이 인정되어 소련군으로 입대를 하게 된다. 1941년에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군으로 참전, 모스크바 방어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이번에는 독일군에게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독일 베를린까지죽음의 포로 행진속에서 목숨을 건졌고, 병력이 부족해진 독일군은 이들을동방부대에 편입시켜 프랑스 노르망디의 유타 해변에 주둔하던 중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히는 기구한 신세가 되었다. 양근수 씨는 영국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1945 5월 독일이 항복하여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석방되어 1947년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시카고 인근에서 살다가 1992년 사망했다강제규 감독의 영화마이웨이는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소련군, 독일군으로 끌려가야 했던 한국인들의 기구한 운명을 영화화 한 것이다.

 

포로로 잡힌 양근정.

 

악전고투 끝에 연합군은 노르망디 해안에 교두보를 구축하는데 성공했고, 상륙을 개시한 후 일주일 만에 32 7천 명의 후속 병력과 5 4천대의 차량, 1 4천 톤의 보급품을 양륙시켰다. 6 27일에는 ‘셰르부르’, 7 18일에는 ‘생로’, 7 24일에는 ‘캉’이 연합군 수중에 떨어졌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연합군은 작전 두 달 만인 1944 8 25일 파리를 되찾은 데 이어 독일 본토로 진격해 들어갈 수 있었다상륙 후 76일 동안 벌어진 노르망디 전투에서 연합군의 인명 피해는 21만 명에 이르렀고, 이 중 3 7천명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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