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11일

‘영화 100년간 최고의 영웅’, 그레고리 펙 별세

산풀내음 2017. 5. 5. 06:37

2003 6 11,

영화 100년간 최고의 영웅’, 그레고리 펙 별세

 

로마의 휴일앨라배마에서 생긴 일(To kill a mockingbird)’의 배우 그레고리 펙(Gregory Peck, 1916 4월 5 ~ 2003 6월 11) 11일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그의 나이 87.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배우들의 위엄 있는 아버지”(스티븐 스필버그) “성실과 정직의 상징”(커크 더글러스) “완벽한 신사”(폴리 버건)로 그를 기리는 말들이 쏟아졌다.

 

그는 행복한 배우였다. 배우로서 명성을 얻는 사람도 드물지만, 그 명성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그러나 그는 50년이 넘는 연기생활 동안 6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내내 관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단 한 번의 스캔들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는 영화와 실제 삶 모두에서 성공한 스타였다.

 

Gregory Peck with wife Greta and their children

 

펙은 1940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했던 스타였다. 그리고 그는 스크린 스타이기에 앞서 미국인의 영웅이었다. 그의 별세 1주일 전, 미국영화연구소(AFI)미국 영화 속 최고의 영웅 50’을 선정해 발표했다. 수퍼맨, 제임스 본드, 인디아나 존스를 제치고 1위에 뽑힌 캐릭터는 바로 그레고리 펙이 연기한알라바마에서 생긴 일(To Kill a Mockingbird)’의 에티커스 핀치였다. 이 작품에서 그는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억울하게 투옥된 흑인을 구명하는 일에 앞장선 정의로운 변호사 역을 훌륭히 해내 1963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그때까지 46년을 살아오는 동안 배우고 느낀 모든 것을 쏟아 부은연기였다. “지금 이 법정에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외쳤던 그의 영화 속 대사는 민권운동의 슬로건으로 활용됐다.

 


To kill a mockingbird, 1962

 

그레고리 펙은 1916 4월 캘리포니아 주에서 출생했다. 5살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머니의 손에서 길러진 그는 "1주일에 한번 할머니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라고 회상하곤 했다. 그래서일까요? 명문 버클리의대에 진학했지만 연극에 심취하여 문학과 연극으로 전공을 바꾼다. 1939년 버클리를 졸업 뉴욕으로 간 그레고리 펙은 플레이 하우스 연기학교에 등록해 착실히 연기를 배워갔고, 1942년 에밀리 윌리엄스의 연극 ‘The Morning Star ‘의 주연으로 발탁되었다. 브로드웨이에서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한 그레고리 펙은 이듬해 할리우드로 진출, 영화 ‘영광의 나날’로 1944년 데뷔하였으나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해 개봉한 영화 ‘천국의 열쇠(The keys of the kingdom)’에서 맡은 신부역으로 눈부신 연기를 펼치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그레고리 펙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이후 그레고리 펙는 실로 놀랄만한 활동을 펼쳐갑니다.

 

The keys of the kingdom

 

1945년 잉그리드 버그만과 공연한 ‘스펠바운드(Spellbound)’ 그리고 1946년 영화 ‘이어링’으로 다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1947년 ‘신사협정’으로 다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는 등 3년 동안 3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4편의 영화를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려놓는 괴력을 발휘했다.

 



Spellbound (1945) with Ingrid Bergman

 

1962년 마침내 ‘앵무새 죽이기’로 그레고리 펙은 4번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그 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억울한 누명을 쓴 흑인 배우를 변호하는 의지의 변호사로 출연한 이 영화는 그레고리 펙이란 배우가 가진 연기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만하다. 이 역할은 최근 미영화학회(AFI)영화100년간 최고의 영웅으로 선정할 정도로 그레고리 펙의 열연은 대단한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말 유행에 따른 서부 영화에 여러편 출연하기도 했지만 오랜 기간 그레고리 펙은 긴 침체기에 빠졌다. 그 시기 큰 아들 존 펙의 권총 자살은 그레고리 펙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되었고 1976, 그레고리 펙은 오컬트 영화의 명작 ‘오멘’으로 화려하게 재기를 했다. 이듬해 1977년 ‘맥아더’에서 맥아더의 역할을 맡았고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펼친다. 특히 미국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맥아더 장군이 한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연설의 말투는 맥아더 장군과 흡사해 당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연기 외에도 자선단체를 포함한 여러 비영리단체에서 맹렬히 사회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케이프피어’ ‘스펠바운드’ ‘신사협정등 많은 대표작이 있었지만,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1953)’, ‘앨라배마에서 생긴 일과 함께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그의 작품으로 기록된다. 이 영화에서 그는 신문기자 역을 맡아 유럽 소국의 공주로 출연한 오드리 햅번과 함께 로마의 거리를 누비며 가장 달콤한 50년대의 사랑을 그려냈다.

 




 Roman Holiday

 

겉모습과 달리 스캔들 한번 없던 이 남자가 생전 가장 좋아한 여배우는 '로마의 휴일'의 파트너이자 꼭 10년 전 세상을 뜬 '세기의 연인오드리 헵번이었다. 그의 삶은 마지막까지 평온했다. 48년간 해로해온 아내 베로니크의 손을 잡은 채 그레고리 펙은 잠들 듯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