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12일

대한민국의 중앙은행, 한국은행 창립

산풀내음 2017. 5. 5. 22:38

1950 6 12,

대한민국의 중앙은행, 한국은행 창립

 

우리나라에 근대적 중앙은행이 처음 생긴 것은 1909년이다. 이름도 지금과 같은한국은행이다. 하지만 이 은행은 이름만한국이지 실은 일본 은행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우리의 경제 주권을 빼앗은 일본이 임원 전원을 일본인으로 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 강제병합으로한국이란 표현이 금지되면서 1911년엔 이름도조선은행으로 바뀌었다. 주된 역할은 일본의 대륙 침략에 필요한 자금을 대는 것이었다.

 


1910년대 조선은행

 

광복 후에는 한동안 혼란이 이어졌다. 조선은행의 일본인 총재·간부를 쫓아내긴 했지만, 광복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의 감당이 쉽지 않았다. 일제의 금융법령에 미 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각종 행정명령이 뒤섞여 법·정책의 일관성도 없었다. 조선은행이 화폐 발행과 국고(國庫) 등 중앙은행 역할 외에 예금·대출 같은 일반은행 업무까지 해온 것도 혼란을 가중시켰다. 새 중앙은행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이유다.

 

하지만 설립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정부는 중앙은행을 정부에 종속시키고 싶어했다. 당시 재정 지출은 조세 수입보다 중앙은행 차입에 더 의존하고 있었다. 생산활동이 워낙 미약해 세금 걷을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중앙은행법 초안은 직원의 신분을 공무원으로 하고, 임원 임면권은 재무부 장관에게 주도록 했다. 화폐 발행 한도도 재무부 장관이 정하게 했다.

 

조선은행 측은 펄쩍 뛰었다. 이러면 중앙은행이 정부의 현금인출기 노릇을 하게 된다고 맞섰다. 양측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금융전문가 파견을 요청했다. 서울에 온 뉴욕연방준비은행의 아서 블룸필드 국제수지과장은 중앙은행의 독립을 주장한 조선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재무부 장관이 한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맡기로 하는 등 절충을 거쳐 한국은행법이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진통은 이어졌다. 당시 법제처장은금통위가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했고, 국회 심의 과정에서 일부 의원이금통위 권한이 대통령보다 더 크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회는 결국 재석 102, 찬성 78, 반대 6으로 한은법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1950 6 12진짜한국은행이 출범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설립된 첫 중앙은행이었다. 초대 한은 총재는 구용서씨로 통화 정책 전문가가 부족했던 당시, 일제 시대 중앙은행 역할을 했던 조선은행에서 한국인으로 가장 높은 지위인 지점장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창립되자마자 수난의 길을 걸었다. 기존의 조선은행권 화폐를 대체할 새 한국은행권 화폐를 발행하기도 전, 창립 13일 만에 6·25를 맞았기 때문이다. 보유하고 있던 지금은(地金銀) 처리가 문제였다. 27일 오후 2, 트럭 1대에 지금은 89상자(순금 1070kg, 순은2513kg)를 실어 진해 해군통제부로 보냈지만, 남겨진 순금 260kg과 순은 1 5970kg은 고스란히 인민군 수중에 떨어졌다. 더구나 북한군이 경제를 교란할 목적으로 약탈한 조선은행권 화폐를 남발하는 바람에 전시상황과 맞물려 경제도 엉망이 됐다.

 

정부는 급히 일본 도쿄 지점에 새 한국은행권 발행을 지시했고, 7 13 100, 1000원권 화폐가 국내로 공수됐다. 첫 한국은행권 화폐였다. 정부는 전쟁 기간 중 다섯 차례에 걸쳐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해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조선은행권을 폐기시키며 경제를 안정시켜 나갔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한국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