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14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5년 8개월의 해외도피생활 마치고 귀국

산풀내음 2017. 5. 8. 20:44

2005 6 14,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5 8개월의 해외도피생활 마치고 귀국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귀국한 14일 오전 인천공항은 취재진과 경찰, 시위대와 환영 인파 수백명이 한꺼번에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성과 욕설이 오갔고 시위대에 의해 경찰차가 파손되기도 했다. 공항을 빠져나가는 데 10분이면 충분할 거리였지만 이날은 40분이 넘게 걸렸다. 인천공항 개항 이래 최악의 혼란상이었다. 김 전 회장은 쏟아지는 질문에 “제가 책임을 지기 위해 귀국했습니다, 진심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만 짧게 말했다. 혼잡은 입국장 밖에서 절정을 이뤘다. 대우피해대책위원회, 사회당, 민주노동당 당원 등 200여명은 김 전 회장이 나타나자 일제히 “구속수사” “사면 불가” 등의 구호를 외치며 물병과 종이뭉치를 던졌다. 일부 시위대는 차 위로 뛰어들었으며, 시위대가 던진 돌에 의해 차량의 뒷유리가 파손되기까지 했다.

 

5 8개월여의 도피생활을 끝낸 대우 김우중 전회장이 14일 새벽 5 57분 인천공항 A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우중씨가 경찰과 경호원에 둘러싸여 인천공항을 빠져나가고 있다

한 시위자가 김우중씨를 태운 경찰차앞에 뛰어들자 경찰이 제지하고 있다.

구속되는 김우중 전 회장

 

한없는 미안함을 가슴에 담고 오늘 저는 대우 가족 여러분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1999 11월 김우중 회장이 그룹 경영에서 물러나며 임직원에게 남긴 고별사 첫 마디다. 이로써 김 회장은 재계 2위의 그룹 총수에서 실패한 경영인으로 전락하게 됐다.

 

1960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한성실업에서 6년간 샐러리맨 생활을 하던 김우중 회장은 1967년 서울 충무로의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원단 수출회사인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그때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대우실업을 시작으로 태동한 대우그룹은 1982년 대우실업을 ㈜대우로 변경하고 그룹 회장제를 도입, 본격적으로 그룹의 모습을 갖췄다.

 

김 전 회장이 대학 졸업 후 홍콩 출장 중에 찍은 사진.

대우실업 공장

 

지난 1988년 동베를린에 국내 최초의 동구권 지사를 세웠던 대우그룹은 93 322 `세계 경영'을 선언,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였던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을 인수하는 등 본격적인 영토 확장에 나섰다. 1993년말 185곳에 불과했던 해외 네트워크는 1998년말에는 모두 589곳으로 늘어나 그야말로 세계 곳곳에 대우가 흔적을 남기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고 1995년에는 첫남북한 합작투자회사인 민족사업총회사를 북한 남포에 설립했다. 1998년에는 쌍용차를 인수, 자동차 부문의 사업 확대를 꿈꿨다. 1998년 연말 대우는 계열사 41, 국내 종업원 105천명, 해외사업장 외국인 종업원 219천명, 해외법인 396개사의 공룡재벌로 성장했으며 자산기준으로 삼성, LG를 제치고 현대에 이어 재계 2위로 올라섰다. 대우그룹은 2000년께 총 650곳의 해외사업기지를 구축하고 해외현지 매출 57조원을 포함, 매출액 138조원을 달성하겠다는 야심찬 중, 장기 비전도 수립해 놨었다.

 

 

그러나 대우그룹의 이런 외형적 성장세속에서도 그룹내실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대우에는 확실히 내세울 수 있는 1등 제품이 없었고 첨단신제품의 개발 및 생산으로 국내외 시장에서 이윤의 대폭발을 거둔 사례도 없어 급격히 커진 외형을 떠받치기에는 내부구조가 취약하다는 게 시장의 우려였다. 아울러 주로 외부 차입에 의존해 설립했던 해외사업장중 제대로 이익을 내는 곳이 별로 없었다는 것도 이런 우려를 뒷받침했다. `외화내빈', 이것이 한국경제의 압축성장의 영욕을 함께 한 뒤 그룹해체 암운의 서막이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한 대우그룹의 현주소였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대우그룹의 위기는 감지되기 시작하였다. 110억여 달러에 달하는 대우그룹의 해외투자는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엄청난 부담으로 부메랑이 돼 돌아왔지만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포기하지 않고 국내외 사업장들의 운영자금 조달을 위해 차입금을 계속 늘려갔으며 결국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1997년 한 해 동안만 무려 8 5000억원의 환차손을 입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대우의 세계경영이 너무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998년 당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폴란드를 방문한 김종필 총리에게 대우 FOS 자동차공장을 안내하고 있는 모습.

 

대우그룹은 1998 12 8 41개 계열사를 10개사로 감축하는 구조조정 세부계획, 1999 121일 ㈜대우의 수영만 부지 매각 등의 재무구조 개선 계획, 419일 대우중공업 조선부문 매각, 김우중 회장 보유주식 매각대금 3천억원 출연 등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안을 잇따라 발표, 위기 탈출을 모색했지만 시장의 신뢰는 회복불능 상태였다.

 

삼성과 진행했던 삼성자동차 인수 빅딜 협상도 6월말 결국 무산됐다. 6월말 대우 사장단 전원의 사표제출에 이어 719일 대우그룹은 101천억원에 이르는 김회장의 전재산 담보라는 극약처방을 제시했으며 곧이어 채권단이 대우에신규자금 4조원 지원을 결의, 대우사태는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치는 듯 했다.

 

1998 12,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청와대에서 열린 정재계간담회에 참석해 김대중 대통령과 '5대 그룹 구조조정'에 합의한 후 환하게 웃는 모습.

 

그러나 정부가 직접 나서 대우사태 종합대책을 내놓은데 이어 채권단이 82612개 주력 계열사에 대한 7억 달러 지원과 함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전격 단행방침을 발표, 대우그룹은 그룹해체라는 운명의 순간을 맞게 됐다. 이미 25곳으로 줄어든 전체 계열사 가운데 ㈜대우, 대우통신, 대우중공업, 대우자동차, 대우자동차판매, 대우전자, 대우전자부품, 쌍용자동차, 대우캐피탈, 경남기업, 오리온전기, 다이너스클럽 코리아 등 12곳이 워크아웃 대상에 포함됐다. 대우증권 등 나머지 13개 계열사는 독자적 회생의 운명에 처하게 됐다.

 

같은 해 96일 ㈜대우, 대우자동차를 제외한 10개사가 은행관리에 돌입, 그룹회장으로서의 김우중 회장의 `파워'는 유명무실해지고 워크아웃에서 제외된 곳들은계 열분리를 통해 속속 떨어져나가는 등 그룹 `공중분해'의 긴박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1999 11월 김 회장의 사표가 정식 수리되고 남대문 대우본사 집무실도 폐쇄돼김 회장은 대우와는 완전히 인연을 끊게 됐고 연말 대우 구조조조정본부의 해체와 2000 년 초 `대우계열 구조조정추진협의회'가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김우중은 1999 10월 중국의 대우자동차 공장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해외로 나간 지 5 8개월만인 2005 6 14일 유랑생활을 끝내고 귀국한다.

 

입국 후 검찰의 조사를 받았으며, 2006 11월 3 열린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징역 8 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 9 253억원의 형을 구형받았고, 항소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2007 12월 31 대통령 특사로 사면되었다. 2014 기준으로 전체 추징금의 0.5%정도인 약 887억원을 납부하였다. 2013 김우중법에 대해 논란이 일었고, 여전히 17 8000여억에 달하는 추징금을 미납한 상태이다. 20148월 26대우그룹 해체 15주기를 맞아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라는 회고록을 출간하였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014 826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대우특별포럼에서 대우 해체에 대한 소회를 밝히기 위해 단상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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