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17일

美 워터게이트 사건 政街 강타

산풀내음 2017. 5. 9. 12:28

1972 6 17,

美 워터게이트 사건 政街 강타

 

1972 6 17일 새벽2,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 내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이 체포됐다. 5명은 비질리오 곤잘레스(Virgilio González), 버나드 버커(Bernard Barker), 제임스 W. 맥커드(James W. McCord), 유지니오 마르티네스 주니어(Jr. Eugenio Martínez), 프랭크 스터지스(Frank Sturgis)이다. 이후 증거 사진에서 그들은 3주 전 같은 사무소에 침입한 적이 있고, 이번 침입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던 도청기를 재설치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판명되었다. 이 중 한명은 백악관 연락처를 기록해둔 수첩을 지닌 채로 체포되었다.

 

백악관 보도 담당은 이에 대해 3류 절도(3rd-rate burglary)라고 하면서 백악관과는 무관함을 강조하였고, 6 22일 닉슨은 기자회견에서 백악관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2주일이 지난 후 5명의 절도범들은 해직된 닉슨 캠페인 재정위원회 변호사 고던 리디와 전 백악관 고문이자 전 중앙정보부 비밀요원이었던 하워드 헌트와 함께 기소되었다. 기소된 일곱 사람은 모두 묵비권을 행사했다.

 

사건이 오리무중으로 빠져 드러갈려는 순간, 워싱턴 포스트에 결정적인 제보가 들어왔다. 제보자는 아직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Deep throat’라는 인물이었고 내용은 백악관이 관련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제보를 통해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와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 기자는 기사를 쓰기 시작하였고 이렇게 닉슨 대통령과 워싱턴 포스트와의 긴 진실게임은 시작되었다.

 

워터 게이트 사건을 폭로한 워싱턴 포스트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을 지휘했던 벤저민 브래들리(Ben Bradlee, 오른쪽 끝)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이 1973년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캐서린 그레이엄(Katharine Graham) 발행인,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의 두 주인공인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과 밥 우드워드(Bob Woodward) 기자, 하워드 사이먼즈(Howard Simons) 편집국장.

 

이런 와중에 1972 11 7일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치뤄졌다. 재선에 도전한 닉슨은 매사추세츠 주를 제외한 모든 주(49개주)에서 민주당 조지 맥거번에 승리해 재선에 성공한다.

 

Nixon 1972 Re-election Campaign

 

그러나 계속되는 폭로에 사건의 파장은 커지게 되었고, FBI까지 나서자 닉슨은 CIA를 통해 수사를 중단시키고 사건에 연루된 참모들도 해임시키며 자신의 무관함을 강변했다. 그러나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모두 녹취된다는 증언 등이 속속 등장하면서 닉슨을 궁지로 몰아갔다. 닉슨은 결정적 증거였던 대통령 집무실 녹음 테이프 공개를 거부했고, 법무장관에게 특별검사 해임을 명령했다. 법무장관은 대통령 명령을 거부하며 사임했고, 법무 차관도 그 명령에 사표로 맞섰다. 결국 빗발치는 여론에 밀려 녹음 테이프를 제출하지만 녹취 내용 8분 가량이 지워진 것이어서 오히려 국민의 의혹과 분노만 키웠다. 닉슨은 이에 대하여 비서의 실수로 훼손되었다고 해명하였지만 이 또한 거짓임이 드러났다.

 

1974 7 24일 대법원은 닉슨의 대통령의 특권을 무효화하는 동시에 녹취 원본을 제출하라는 판결을 내렸고, 1974 7 28~30일 하원 사법위원회에서는 대통령 탄핵안이 채택되었다. 탄핵이냐 사임이냐의 순간이었다.

 

1974 88일 저녁 리처드 닉슨(19131994) 미국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사임 연설은 TV를 통해 미국 전역에 중계됐다. 8 9일 정오 무렵 닉슨은 가족과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백악관을 떠났다. 헬리콥터에 올라 두 손으로 V자를 한 닉슨의 마지막 모습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됐다. 이날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제럴드 포드(19132006) 부통령은 취임 선서를 한 뒤 "오랜 국가적 악몽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2년여간 미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막을 내렸다.

 

사임을 발표하는 닉슨

닉슨 가족을 환송하는 제럴드 포드

백악관을 떠나는 닉슨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19131월 9 - 1994 4월 22)은  로스앤젤레스 근처의 넉넉하지 못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1946년에는 연방 하원의원에, 1950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39세의 나이로 아이젠하원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 재선되어 한번 더 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1960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민주당존 F. 케네디와 치열한 접전 끝에 패하였다. 1968에 재도전하여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1969 미국 제 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취임시절 1969년 닉슨 톡트린 발표, 1972년 미국 대통령으로 처음으로 중공을 방문하여 마오쩌둥과 미중정상회담 및 같은 해 소련 방문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 등을 하였다. 1972년 재선에 성공하지만 1974년 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 퇴임하였다.

 

The China-visit of President Richard Nixon symbolizes the beginning of the normalization of Sino-US rel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