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일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청계 고가 철거 시작

산풀내음 2017. 5. 28. 09:02

20037 1,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청계 고가 철거 시작

 

2003 7 1, 1976년 완공돼 서울 근대화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던 청계고가도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로써 2 3개월의 대역사(大役事)가 시작되었다하늘에는경축 청계천 복원공사라는 애드벌룬이 떴고, 청계고가도로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는 시민들이 오후부터 몰려들었다.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시민들도 많았다. 기공식 행사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은회색빛 콘크리트가 상징하는 반생명의 그늘을 과감히 걷어내고 서울을 살아 숨쉬는 도시로, 보다 안락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쾌적한 삶의 쉼터로 만들자고 말했다.

 

 

1) 해방 및 한국전 전() 청계천

 

청계천의 옛 이름은 개천(開川)으로, 24개 다리가 가로질렀다. 원래 북악·인왕·남산에서 흘러 든 맑은 물이 합쳐지던 청계천은 동쪽으로 내쳐 흘러 왕십리 밖 살곶이 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어우러진 다음 한강으로 흘러 들었다.

 

본래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조선 태종 때부터 한양을 서울로 한 조선시대 내내 개거, 준설 등 치수 사업의 대상이었다. 태종은 1406년부터 자연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았으나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1411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고, 이듬해 1 15일부터 2 15일까지 큰 공사를 실시하였다. 청계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를 돌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세종은 청계천의 지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종로의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는데,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세종은 1441년에 마전교 서쪽에 수표를 세워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 강점기 서울이 인구 70만 명의 대도시가 되면서 청계천변의 교통과 위생 문제가 악화하기 시작했다. 인공 하수도가 따로 없어 생활하수가 청계천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갔고, 이 과정에서 분뇨와 토사가 쌓여 하천 바닥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1918년부터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청계천과 특히 일본인이 많이 살던 남쪽 지류에 대한 준설작업을 하던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청계천 복개를 결심한다. 지루하게 계속되던 전쟁 상황 속에서 일제는 서울을 병참기지화 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신속한 물자 수송을 위해 서울 중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을 복개, 도로를 넓힐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일제는 1937년부터 1942년까지 광화문우체국 앞의 대광통교에서부터 영풍문고가 있는 광통교 인근까지 구간에 걸쳐 청계천을 복개한다. 한강을 비롯한 대다수 하천이 서쪽으로 흐르는 데 반해 동쪽으로 흐르던 청계천, 1910년대 청계천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후 처음으로 인간에 의해 세상의 빛으로부터 격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 삼청동천, 나무 뒤로 경복궁 건춘문이 가려져 있고, 천변 우물가에 물장수가 물지게를 지고 있다.

1904년 천변빨래터, 청계천 상류 지점

1927, 금청교, 금청교는 청계천에 처음 놓인 돌다리로 청계천 상류 부근에 체부동과 통의동, 적선동, 내자동으로 통하는 십자로에 있었다.

청계천 수포교

 

 

2) 해방 및 한국전 후 오염된 청계천

 

1945년 해방을 즈음하여 청계천에는 토사와 쓰레기가 하천 바닥을 뒤덮고 있었으며,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들과 거기에서 쏟아지는 오수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1949년 광통교에서 영도교까지 청계천을 준설하는 계획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이마저도 1950 6월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더구나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생계를 위하여 서울로 모여든 피난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변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반은 땅 위에, 반은 물위에 떠 있는 판자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형성된 판자촌과 여기에서 쏟아내는 생활하수로 청계천은 더욱 빠르게 오염되어 갔다. 엄청난 양의 하수가 도심 한가운데를 흐르면서 발생하는 악취로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으며, 도시 전체의 이미지도 크게 손상되었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으며, 위생 면에서나 도시경관 면에서 청계천을 그대로 두고 서울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기초적인 생활필수품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웠던 당시 우리 나라의 경제상황 속에서 청계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유일한 방법, 그것은 '복개(覆蓋)'였다.

 

 


광복과 한국전쟁 후 서울로 피난 온 피난민들은 청계천변을 따라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염색한 천을 말리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대 위에 널고 있다. 이렇게 염색물은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가 오몀 및 악취의 원인이 되었다.

 

 

3) 청계천 복개

 

청계천은 이미 광통교 상류 약 136m를 복개한 것을 시작으로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개되기 시작하였다. 1958 5월부터 1961 12월까지 광교에서 청계6가 동대문운동장까지 2358.5m 구간이 복개되었고,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청계 6가에서부터 청계8가 신설동까지, 1970년부터 1977년까지는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어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이 같은 복개 공사를 통해 총 길이 3670m 최대 너비 84m에 이르는 청계천은 광교와 수표교, 오간수교, 영미교, 관수교 등 모두 24개의 다리와 함께 지하로 모습을 감추게 된다.

 

1965, 오간수문 밖 하류 청계 6가 청계천변


청계천 복개공사 준공식 청계천은 1958년부터 구간별로 복개공사가 이뤄졌다. 사진은 1961 1단계 공사가 완공된 이후 촬영한 것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런데 청계천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복개된 도로 양쪽으로 상가가 밀집,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도심에서 외곽으로 빠지는 새 도로가 필요했다. 이에 아스팔트 도로를 뒤집어 쓴 청계천은 그 위에 또 하나의 도로를 덧쓰게 된 것이다. 바로 청계고가다. 청계고가는 1968년 마포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마포로를 고가를 이용해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이 771m로 건설한 아현고가도로에 이어 두 번째 들어선 고가도로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고속도로다.

 

불도저 시장김현옥의 지휘 아래 1967 8 15일 시작된 공사는 1976 8 15일 완공을 본다. 청계고가는 너비가 16m에 이르고 길이 5.8 km의 왕복 4차선 전용도로로서 고가 아래에 숨어 있는 청계천에서 1984 11 7일 그 이름을 따왔다. 청계고가도로 아래의 도로는 청계천로라고 불렸으며, 청계고가는 당시 교통을 분산시키고 교통흐름을 빠르게 하는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청계천 주변에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은 헐리고 대신 현대식 상가건물이 들어섰으며, 토사와 쓰레기, 오수가 흐르던 하천은 깨끗하게 단장된 아스팔트 도로로 탈바꿈하였다. 시원하게 뚫린 복개도로와 고가도로 위에는 자동차가 쏜살같이 달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서울의 가장 부끄러운 곳이었던 청계천은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으로 서울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1965, 평화시장은 청계천이 오간수문까지 복개되면서 함께 문을 열었다. 시장 이름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월남한 피난민들이 세웠기 때문에 평화를 기리는 실향민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1968, 세운상가는 건축가 김수근씨가 최신 건축사조를 끌어들여 만든 최첨단 건물이었다.

 

청계천이 복개 이후 약 40년이 지난 청계천은 도심산업의 중심지로서 도로 양편으로 공구상, 조명가게, 신발상회, 의류상가, 헌책방, 벼룩시장 등 크고 작은 상가들이 밀집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에는 하루에도 수십만 대의 차량들이 지나 다닌다. 그러나 더 이상 청계천을 서울의 자랑거리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서울에서 가장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청계천 주변을 낙후시키고, 서울의 이미지를 해치는 주범으로 지적 받고 있으며, 청계고가도로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이 아니라 개발시대의 무지가 낳은 흉물로 인식됐다.

 

돌이켜 보면 청계천만큼 지난 서울의 역사를 분명하게 농축하고 있는 곳은 없다. 1950년대 말 쓰레기와 오수로 뒤덮인 불결과 빈곤의 상징에서, 1960, 70년대는 성공적인 산업화·근대화로 상징되었으며, 1980, 90년대는 공구, 인쇄, 의류 등 도심산업의 중심지임과 동시에 소음·혼잡·매연 등으로 도시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4) 청계천 복원

 

1990년대에 들어 청계천의 복개 구조물과 노후한 청계고가도로의 안전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이명박 당시 서울특별시장 후보는 청계천 복원을 공약하였고, 32대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2003 7월 1에 청계고가도로의 철거가 시작되었고,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 철교에 이르는 약 5.84km의 구간을 복원하는 공사는 386,739백만원을 들여 2005 9월 30에 완료되었다. 복원된 청계천의 통수단면 위쪽을 흐르는 물은 잠실대교 부근의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과 도심의 지하철역 부근의 지하수를 정수·소독 처리하여 조달하며, 통수단면 아래쪽을 흐르는 물은 도심의 오·폐수이다.

 

철거될 예정인 청계고가도로에서 2003 5 25일 열린 ‘시민 걷기대회’에 1만 여명의 시민이 참가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대회는 동대문구 신답초등학교를 출발해 청계고가를 지나 서울시청 앞까지 6.5km 구간에서 펼쳐졌다. 서울시는 ‘하이 서울 페스티벌’ 행사의 하나로 이 대회를 개최했다.




광화문 태평로 거리에서 청계천 방향의 무교동 일대의 모습. 왼쪽은 1978, 오른쪽은 2005년 청계천 복원 당시

 

청계천 장통교 옆 벽면에 1795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을 행차하는 것을 그린 반차도(班次圖)를 타일로 옮겨놓은 벽면 예술,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 복원해 놓은 복개 이전에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던 '청계천 빨래터', 청계천 복원 사업에 맞추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만든 타일 벽인 '소망의 벽' 등이 시설물로 설치되었다. 또한 '존치교각'이라는 이름으로 옛 청계천 고가도로의 교각을 3개 남겨 놓았다. 청계천 입구의 청계광장에는 팝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가 설계하여 KT가 서울시에 기증한 소라탑이라는 작품이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