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0일

그린피스 핵실험감시선 ‘무지개 전사’호, 뉴질랜드 오클랜드항서 폭발

산풀내음 2017. 6. 6. 08:33

19857 10,

그린피스 핵실험감시선무지개 전사(레인보워리어), 뉴질랜드 오클랜드항서 폭발

 

1985 7 10일 오후 1150분경 뉴질랜드의 오클랜드항에 정박중이던 국제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 소속 핵실험감시선무지개 전사(Rainbow Warrior)호가 기뢰 폭발로 침몰, 1명이 사망했다. 감시선은 무로아 환초에서 프랑스 핵실험 중단을 호소하기 위해 활동 중이었다.

 

 


뉴질랜드 정부의 조사에 의해 이 사건은 프랑스 정보기관 DGSE(대외치안총국)의 계획적인 폭발로 밝혀졌다. 11월말 체포된 2명의 DGSE 공작원에게는 10년 금고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이듬해 7, 뉴질랜드 수상은 배상금으로 7백만 달러를 받고 범인 2명을 프랑스에 인도해 양국 국민을 경악하게 했다.

 

2차 대전 후 프랑스는 핵무기에 관해서는 소외된 나라였다. 미국은 핵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하탄 계획의 진전 상황을 영국과 공유했고 소련은 그 스파이망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낱낱이 읽고 있었지만 나찌에게 점령당한 망명 정부로 명맥을 유지했던 프랑스는 당연히 찬밥일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위신은 전쟁 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전후 다시 발을 들이밀었던 베트남에서는 디엔비엔푸 전투로 위신이 무너졌고, 수에즈 운하에서도 손을 떼야 했다.

 

1956년 프랑스의 기 몰레 총리는 프랑스의 군사적 핵 개발에 대한 권리를 천명했고 프랑스 의회도 이에 동조하였다. 당시의 프랑스 국력으로는 무리다 싶을 만큼 핵개발에 전력투구를 했다. 역시 핵개발에 목숨을 걸었던 드골의 집권 당시 드골의 말을 인용하면 이렇다.

 

우리 프랑스에 프랑스의 국가이익을 위해 어디에서나 즉각 동원될 수 있는 군사력, 즉 독자적 핵타격력이 필요하고, 이것을 수년 내에 반드시 달성하여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군사력의 기본이 핵무장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제조하든 혹은 돈으로 구입하든 간에 그것은 우리 수중에 있어야 한다. …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독자적 핵전력을 갖추지 못하면) 더 이상 유럽의 강대국도 주권국일 수도 없고 통합된 위성국에 지나지 않게 된다.”

 

19602 13일 프랑스가 알제리 남서부 사하라 사막 ‘인 에케르’ 핵 실험장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이로써 프랑스는 미국, 소련,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의 핵보유국이 되었다. 이 실험에 사용된 원자폭탄은 TNT 화약 70킬로톤에 이르는 양으로, 미국이 최초 실험한 원자탄의 3배가 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압력과 유엔의 비난을 무시하고,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프랑스 대통령은, 핵실험 성공을 보고 받은 후 “위대한 프랑스 만세! 오늘 아침 이후로 프랑스는 더욱 강하고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었다!”라고 환호했다. 그 해 4 1일에는 두 번째 핵실험이 이어졌다. 이 후에도 여러 차례 핵실험 끝에 프랑스는 폭발력 60Kt 규모의 AN 22 원자폭탄을 보유할 수 있었다.

 

사하라사막에서의 핵실험

 

1962, 오랜 독립전쟁의 결과로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자 프랑스는 새로운 핵실험장을 모색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드골 집권 당시 찾아낸 곳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Polynesia)의 아름다운 산호섬들인 ‘무루로아 (Mururoa)’와 ‘팡가타우파 (Fangataufa)’였다. 1966 7 2, 무루로아 환초에서 첫 번째 버섯구름이 솟아 오른 이래, 마지막 실험이 있었던 1996 12월까지 30년 동안 예술을 사랑하고 격식을 즐기는 프랑스인들은 무려 193회의 핵실험을 두 섬에서 실시하였다(무루로아 173, 팡가타우파 15). 적어도 핵무기에 관한 한 프랑스는 줄기차게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1978년에는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중성자탄 실험에 성공한다. 물론 그 대가는 남태평양의 산호섬에 불러온 끔찍한 환경재앙이었다.

 






This photograph was taken in 1968 by French soldiers. Charge capacity of the first bomb of the series Canopus was 2600 kilotons, which is approximately 20 times smaller than previously tested king-bomb in the USSR.

 

 

1982년 명색 좌파인 사회당 정부가 섰지만위대한 프랑스에 대한 집념은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미테랑 대통령은 1985년 핵실험을 강행하겠다고 나섰는데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한 단체가 있었다. 그린피스. 1971년 미국의 알래스카 암치카(Amchitka) 섬 핵실험을 저지하기 위해 캐나다 서부의 밴쿠버 항구에서 12명의 환경 보호 운동가들이 모여 결성한 국제 환경보호 단체. 반핵시위 도중 배 중앙에 그린피스라고 쓴 녹색 깃발을 내건 것을 계기로 그 이름을 획득한 환경단체. 이들이 그들의레인보우 워리어호를 타고 프랑스의 핵실험을 저지하기 위해 실험 현장으로 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프랑스 정보기관 DSGE가 바빠진다.

 

그들은 레인보 워리어 호에 폭탄을 달았고 1985 7 10일 레인보 워리어 호는 두 번의 폭발 끝에 침몰한다. 첫 폭탄은 약했고 두 번째가 강했다. 첫 폭발로 겁을 줘서 선원들로 하여금 하선케 하려던 계획인 듯 했지만 포르투갈의 사진 기자 하나가 일단 배가 가라앉지 않자 선실로 들어가 자신의 카메라를 들고 나오려다가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고 사진기자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반핵 시위를 벌이던 뉴질랜드 배를 손 본 전례를 지닌 프랑스는 대번에 용의 선상에 오르지만 극구 부인한다. 그러나 프랑스에게는 불행하게도 DSGE 첩보원들이 뉴질랜드 경찰에 체포되면서 모든 사실이 밝혀진다. 프랑스 측의 자체 조사에서도 잠수부가 15명씩이나 동원돼서 폭탄을 달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Portuguese photographer Fernando Pereira who died during explosions on board of Greenpeace ship


총리가 나와 공개 사과하는 가운데 미테랑 대통령은 DGSE 단독 행동이라고 선을 그었고 그들은 정보기관답게 책임을 졌다. 작전의 입안자이자 실행자였던 라코스트 제독은 자서전에서 조차 대통령의 개입을 부정했고 국방장관은 온갖 비난을 들으면서도 침묵했다. 결국 미테랑의 최종 승인 하에 이 국가적 테러가 자행된 것이 밝혀진 것은 레인보우 워리어 호가 침몰하고 20년이 지난 뒤였다. 최고 책임자는 자신의 명령을 부정했고 정보기관은 그들의 명예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 구정물을 뒤집어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