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1일

산업은행 연계자금 부정대출 국회서 폭로

산풀내음 2017. 6. 6. 11:23

19587 11,

산업은행 연계자금 부정대출 국회서 폭로

 

1958 7 11일 민주당 박해정(1916-1966) 의원은 국회발언을 통해 산업은행의 대규모 부정대출을 폭로했다. 1958 5·2총선을 약 2주일 앞둔 4 20일부터 산업은행에서 기간산업 육성자금 명목으로 특혜자금 40억환을 12개 기업체에 부정대출 했다는 것이다. 대출목표를 80억환으로 책정한 이 특혜자금의 재원은 산업은행에서 차후 금융채권을 발행해 마련키로 하고 우선 산업은행 지불보증으로 시중은행이 먼저 대출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연계자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50년대 후반 당시 산업은행은 자유당 정권의 친여권 기업에 대한 권력형 부정대출의 주된 창구였다. 당시 산업은행은 지금의 명동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

 

산업은행 자금은 이른바 정치자금의 루트로 알려져 많은 국민들로부터 의혹을 사고 있었는데 특히 이 연계자금의 대출대상기업체 중에는 부실 섬유기업체들이 들어있어 야당과 언론의 비난이 더욱 거셌다. 이들 기업체는 실제로 12년 내에 파산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7 15일 새로 구성한 제4대 국회에서 산업은행 연계자금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려 했으나 여당인 자유당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런 부실·불법대출로 인해, 1958년 말 현재 산업은행의 대출연체액은 총 대출 1000억환 중 500억환 이상이었다. 산업은행은 이미 전과가 있었다. 1954년의 금융계 부정사건과 제1회 산업부흥국채사건, 1956년의 지불보증사건 등이다. 지불보증사건은 폭설피해 복구자금으로 59600만환, 석탄공사 8억환, 대한중공업 56000만환, 조선전업에 15억환, 주택영단에 34000만환을 각각 국회동의 없이 불법 지불보증한 것이 문제가 되어, 총재가 재발방지를 서약했다. 어찌 산업은행뿐이겠는가? 당시 정치재벌의 손아귀에 장악된 시중은행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계자금사건 외에, 1950년대 금융관련 부정사건으로 국회에서 문제가 됐던 대형사건으로는, 정부 보유달러 부정불하와 관련된 중석불사건, 정부보유달러 외화대부사건 및 대충자금(大充資金)사건 등이 있다. 대충자금은 미국의 원조로 조성된 17억 달러의 엄청난 돈으로, 당시 우리 산업재건에 중요 재원이었다. 이 원조자금이나 정부보유달러를 배정하는 것은 정부의 권한으로서, 일단 받기만 하면 시장금리 및 환율과의 차이로 2~3배의 폭리가 보장되는, 엄청난 특혜였다.

 

자유당정권 하에서 가장 황당한 은행대출은, 아마도 1955년 실행된 이승만 대통령탄신 80주년 경축금 대출일 것이다. 그 해 봄 국무원 사무국에서는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 탄신경축중앙위원회를 창설하고 위원장에 이기붕을 추대했다.

 

위원회에서는 이승만의 팔순을 축하하는 경축금 3억환을 상납하기 위해, 전국극장연합회를 조직하고, 극장 입장객으로부터 10~20환씩 더 거둬 그 돈을 조성하기로 했다. 입장권이 200환 미만이면 10, 200환 이상이면 20환을 더 걷는다는 것이니, 관객들의 호주머니를 강제로 턴 돈으로 자신들이 이승만에게 잘 보이겠다는 심보였다.

 

국민의 피로 80살 생일잔치 중인 개 잡놈과 개 잡년이 열심히 처먹고 있는 장면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자리인 당시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이승만 84회 탄신일 축하 행사 모습. 평양에서 열린 행사로 착각할 정도이다.

 

그러면 1955 3 26일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당시 상황을 기록한 대한뉴스에 따르면 "당일 아침부터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에서 ‘80회 탄신’을 축하하러 온 방문객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외교사절로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내한한 미국의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해 필리핀 공사 테일러 우드, 콜터 장군, 김홍일 주 자유중국 대사, 왕동원 자유중국 대사 등이 잇따라 예방했다. 이어 국내 3부 요인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찾아와 ‘80회 탄신’을 축하했다. 접견을 마친 이 대통령 부부는 승용차 편으로 서울운동장으로 출발했다. 이 곳에서는 대대적인 경축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시민과 학생 수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숙명여고와 배재고 남녀 학생들이 고전무용과 매스게임을 벌이며 잔치 분위기를 띄웠다.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에 맞춰 ‘80’이란 숫자를 연출했고, 그 주변에 ‘만수무강’이란 글자를 만들었다. 군인들까지 대거 동원됐다. 서울운동장 하늘에는 전투기 여러 대가 공중 분열식을 벌였다. 오후에는 세종로에서 육군과 공군, 해병대 장병들이 생일을 축하하는 대규모 시가행진을 벌였다. 여기에는 국군의 날처럼 탱크부대까지 동원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지방에서는 탄신 경축 기념식수와 경축 경노잔치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시내에는 ‘탄신’을 축하하는 꽃마차까지 다녔다. 여성 궁사들을 동원해 기념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경축금을 전달하려면 당장 현금이 필요했고, 관객들에게 돈을 거두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한다. 그래서 4대 시중은행에서 먼저 대출을 받아 충당키로 한 것이었다. 위원회 이기붕 위원장을 채무자로 하고, 극장연합회 간부 임화수(이승만이 총애하던 정치깡패)를 비롯한 4명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4개 은행이 공동으로 3억환의 대출을 실행했다. 3억환은 이승만의 동상건립기금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그 후 1959 4월까지는 전국의 극장에서 거둔 돈으로 원리금을 갚아나갔으나, 4월 혁명이 터지자, 원리금 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채무자인 이기붕은 혁명 직후 자결했다. 따라서 4개 은행은 1960 11 24일 현재 6525944환의 부실채권을 안게 됐다.

 

이에 은행들은 연체대출금 상환을 전국의 각 극장에 요청했으나, 채무자도 아닌 극장들이 이를 갚을 리 만무했다. 할 수 없이 은행들은 임화수 등 4명의 보증인에게 대출금상환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물론 승소했다. 그러나 임화수와 백운성 등 보증인들에게는 압류할 만한 변변한 재산이 없어, 연체대출금은 대부분 끝내 회수하지 못했다.

 

이러한 자유당정권의 횡포는 마침내 1960 3·15 부정선거로 극치를 이루면서, 그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영구집권을 위해 3·15 부정선거에올인한 자유당정권은 부정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예의 부정대출 커넥션을 동원했다. 그 결과 1000만환 이상의 선거자금을 바친 기업인들이 200여 명, 총액은 70억환에 달했다. 또 도로사업비 등 정부사업예산에서 80억 환을 전용, 선거자금으로 사용했다.

 

이 선거자금 조달작전에 앞장선 것은 박용익 자유당 총무위원장이었고 송인상 재무장관, 김진형 한국은행총재, 김영찬 산업은행총재, 김영휘·배제인 한국은행 부총재 등이 동원됐다. 우선 12개 주요업체로부터 선거자금을 징수했다. 대한양회, 극동해운, 중앙산업, 경남모방, 동양시멘트, 삼호방직, 대한방직협회, 삼성물산, 태창방직, 대한방직 등 주요 재벌들이 수억 환씩, 도합 21억환을 모금했다. 또한 산업은행은 산업부흥국채 인수를 핑계로 13개 업체에 42억 환을 대출해주고, 대출액의 30% 내외를 선거자금으로 뜯어내, 17억환을 조달했다.

 

대한중공업 9억환, 대한양회 5억환, 기아산업 35000만환, 조선방직 5억환, 락희화학 2억환, 한선기계 15000만환, 한국나일론 22500만환, 동립산업 7억환, 대한중기 3억환, 동신화학 2억환, 고려모직 2억환 및 극동연료 5억환 등이었다. 이것이 1958년의 연계자금 사건에 이어, 산업은행의 제2의 정치자금 의혹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