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8일

스페인 내전 발발

산풀내음 2017. 6. 11. 16:59

19367 18,

스페인 내전 발발

 

718부터 1492까지,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몰아낸 이후의 스페인은 강력한 권한을 가진 왕정과 특권화된 로마 가톨릭 교회으로 특징 지워졌다. 이후 신대륙을 발견하고 브라질을 제외한 라틴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거느리던 대제국. 영국 이전에 벌써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했다. 그러나 1588년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가 영국 엘리자베스 1세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등 신흥 강국들에 추월 당해 제해권(制海權)을 잃었고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쟁에서 국력을 소모했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1백 년 동안 스페인이 치른 전쟁은 30년 전쟁, 네덜란드 독립전쟁, 포르투갈 왕위 계승전쟁, 이탈리아 전쟁 등 일일이 손으로 꼽기조차 어려울 만큼 많았다. 중세 후기 1,400만 명이었던 스페인의 인구는 18세기 후반 700만 명으로 감소하였고, 국민들의 생활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이런 와중에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스페인 토지의 대부분을 독식하게 되어 빈부의 격차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에 더해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에 반발하는 지역주의 운동이 16세기 이래 계속되고 있었다.

 

이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들도 연이어 독립을 선언하자, 스페인 재정은 더욱 쪼그라들었고 20세기 초반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마저 미국에 빼앗긴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왕정 종식의 요구로 이어졌고 1873스페인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1874 1 2일 파비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1공화국은 군부 독재로 변질되었고, 1874 12 19일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이 알폰소 12세를 국왕으로 추대하여 왕정을 복고 시켰다. 이후 알폰소 13세 때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스페인은 중립을 지켜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벌어들인 부의 대부분은 소수의 지배계급에 집중되었다. 이로 인한 갈등은 결국 1917 총파업투쟁을 불러일으켰다.

 

1923년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군사독재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1929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에 의해 경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로 인해 리베라는 1930년 스스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1923 9 14, 마드리드 시내에서 군사정권 수립 포고문을 낭독하는 병사들과 둘러싼 시민들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 (Miguel Primo de Rivera)

 

이후 스페인 정국은 혼란에 빠진다. 그 동안 함께 권력을 누렸던 왕당파와 군부는 반목하고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에서는 군부의 쿠데타가 감지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조합의 총파업이 예고되었다. 1931년 알폰소 13(Alfonso XIII, 1886 - 1941)는 총선을 약속한다. 4 12일 이루어진 총선의 결과 공화파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자 4 14일 알폰소 13세는 망명한다. 이렇게 스페인의 제2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알폰소 13세와 가족들

 

알칼라사모라(Niceto Alcalá-Zamora y Torres, 1877 - 1949)2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헌법도 마련됐고 여성 투표권도 보장하는 등 민주주의 국가의 틀을 갖추어 가나 했지만, 기득권층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지주, 교회, 군 등 보수 세력은 너무도 막강했고 1932년 당시 0.97%의 지주가 농지의 42%를 차지하고 있던 기형적인 토지 소유 구조에서 보듯, 스페인의 사회 구조는 지극히 불평등한 모순덩어리 그 자체였다. 토지 개혁이 시도됐지만 번번이 반발에 부딪혀 좌절됐고, 정부가 개혁에 힘쓰면 힘쓸수록 반발 역시 극단으로 치달았다. 군부는 일삼아 쿠데타를 기도하며 정부를 압박했고 교회 역시 정부를 눈엣가시로 보았다.

 


1932년 시찰 중인 알칼라사모라

 

두 번째 총선은 1933년에 있었는데 이 선거에서 좌파는 분열했고 우파는 우파연합으로 단결했다. 자유주의를 표방한 급진당과 우파연합이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됐고 좌파들은 이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1933년 카디즈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가 진압됐고, 1934년에는 오늘날까지도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카탈루냐 지방정부가 독립을 선언,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포했다가 정부군의 반격을 받아 붕괴되기도 했다.

 

우익의 경우, 극우 장교들이 암살단을 조직해서 노조 지도자와 좌익 인사들에게 총을 쏘고 다녔다. 그리고 1934년에는 반정부 총파업 와중에 아스투리아스 광산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코뮌을 수립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정부는 모로코에 파견돼 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정예부대를 투입하여 5천여 명의 노동자를 학살하고 3만 명을 투옥시켜 코뮌을 진압했다.

 

1936 1, 우익 정권의 수반 레루가 금융 스캔들에 휘말려 불명예 퇴진한다. 또 한 번의 선거를 치러야 했다. 1936 2 16일의 총선이었다. 이 선거는 스페인의 좌우 양쪽 모두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인다. 특히 1931년 총선에서 분열로 패배했던 좌파들은 선거 승리의 목표 하에 단결한다. 이름하여인민전선이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선거를 외면해 왔던 세력들도 가세했다. 당시 스페인의 최대 노동조합 조직으로 150만 조합원을 거느렸던 전국노동자연맹(CNT)의 무정부주의 지도자들과 무정부주의 비합법 조직인 스페인 무정부주의연합(FAI)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선거 불참 원칙을 깨고 인민전선 후보들을 지지했다. 마침내 인민전선과 그 지도자 마누엘 아사냐는 승리의 깃발을 들어 올린다. 표차는 크지 않았다. 득표율 배분에 따라 인민전선은 273, 우익은 137, 중도와 지역 정당들이 그 나머지를 차지했고 인민전선은 여당이 됐다.

 

1936 2월 총선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세력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승리하면서공화좌파마누엘 아사냐를 총리로 하는 인민전선 공화정부가 수립됐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에 의해 멀리 카나리아 제도의 군사령관으로 좌천된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장군은 쿠데타의 칼을 갈고 있었고, 무신론자들은 교회를 파괴했으며, 기업주들은 공장을 폐쇄했다. 1936 2 16일의 선거 이후 6월까지 죽어 나간 사람이 269. 부상자 1,200, 파괴된 교회가 400여 개에 300건이 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급기야 1936 7 17일 프랑코 장군이 중앙 정부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100만 명이 희생된 파괴적인 전쟁인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고 만다. 그리고 그로부터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스페인 국민들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것을 강요하는 독재 치하에서 살아야 했다. 나폴레옹이피레네 산맥(스페인과 프랑스 국경) 이남은 아프리카다.”라고 경멸스럽게 쏘아붙인 그대로 유럽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정치적 후진국으로서 그 오랜 세월을 버텨야 했던 것이다.

 

군부 프랑코를 위시한국민진영은 파시즘 세력인 팔랑헤당과 보수적 가톨릭교회, 자본가, 지주계급이옛 스페인복원의 깃발 아래 단결했다. 인민전선 정부의 공화진영은 공화연합, 공화좌파 등 자유주의 세력, 사회주의노동자당, 에스파냐공산당, 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 등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세력, 전국노동연합 등 아나키즘 세력이 한데 집결했다.

 

Francisco Franco's troops in Barcelona during the Spanish Civil War, late 1930s.

Male and female militia fighters on the march at the beginning of the Spanish Civil War. (Photo by Keystone/Getty Images). July 1936

Marina Ginestà of the Juventudes Comunistas, aged 17, overlooking Barcelona during the Spanish Civil

 

내전은 곧바로 국제전의 양상을 띠는데,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이 프랑코의국민진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반면, 공산주의 확산을 걱정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불간섭 정책을 펴며공화정부에 등을 돌렸다. 내전 초기 지원을 머뭇거리던 소련의 스탈린은 결국꼭 필요한 정도만 돕기로결정하고 공화정부 지원에 나섰다.

 

반란군은 모로코 주둔부대들을 필두로 본토의 세빌리아 바르셀로나 안다루시아 등 전국적으로 궐기했다. 이들은 압도적인 1936 11월에 마드리드의 외곽에 도착했다. 도시가 함락될 것이라고 확신한 공화파 정부는 발렌시아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국민당 선발대는 민병대 조직의 분투로 마드리드를 함락시키는 것에 실패하게 된다. 또한 다른 대도시에서도 민병들에 대패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스페인 민중들의 힘은 전세계 지식인들을 흥분시켰다. 공황과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던 그들이었다. 앙드레 말로, 어네스트 헤밍웨이, 네루다, 시몬느 베이유, 조지 오웰, W H 오든 등 세계적인 지성들을 포함, 4만여 명의 외국인 용병이 삽시간에 모여 `국제여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공동의 적인 국민진영을 앞에 두고 공화진영은 자기 분열했다. 1937년 초 스탈린의 지시를 따르는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이 권력 장악에 나서면서 공화 진영 안에서 권력 주도권 다툼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무고한공화군 전사들이 탈주자, 반역자, 스파이로 몰려 살해됐다. 공산당에 속하지 않은 공화군은 무기를 받지 못하는가 하면 병원 치료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권력을 집중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공세는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의 완강한 저항에 맞닥뜨렸고, 내분을 계속하다 자멸의 길내전 속 내전으로 나아간다.

 

아나키스트 세력이 강했던 카탈루냐 바르셀로나에서 발생한 비극의 ‘5월 사건!’ 카탈루냐 공산당과 아나키스트 계열의 전국노동연합, 마르크스주의통합노동자당 간에 벌어진 파국의 시가전이다. 스탈린 공산주의자들이카탈루냐 반란이라고 부르는 그내전 속 내전은 결국 아나키스트 계열의 패배로 끝났다. 이 결과 후안 네그린 총리가 이끄는 공화정부는 6월 통합노동자당과 전국노동연합을 불법화했고, 통합노동자당 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수용소로 보내진 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아나키스트 이론가 아바드 데 산티안은네그린이 공산주의자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프랑코가 이탈리아와 독일인을 데리고 승리하든 우리에게 그 결과는 다를 바 없다고 썼다.

 






 

공화진영의 분열 등에 힘입어 1939 3 28일 프랑코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함으로써 파시스트의 승리로 3년에 걸친 스페인 내전(Spenish Civil War)은 끝났다. 이 전쟁은 35만 명의 사망자와 50만 명의 외국 망명자, 30만 명의 수감자를 낳았다. 1939 4월 내전의 최종 승자가 된 프랑코는 이후 37년 동안 철권통치를 이어갔다.

 

Generalissimo Francisco Franco reviewing his Falangist troops after taking Madrid in 1939

The Condor Legion takes part in a victory parade in Madrid on May 19, 1939

 

 

여기서 한 여성 노동 운동가의 생애를 되짚어 보자. 돌로레스 이바루리(Dolores Ibarruri, 1895-1989). 그녀는 광산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인민전선의 주요 지도자가 된다. 이바루리는 인민전선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한 연설, 스페인 인들은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더 원한다. (It’s better to die than to live on your knees)”라는 절규와 “(파시스트들은) 결코 전선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No Passaran!)의 구호로 유명해졌다.

 

 

이 구호는 내전 내내 공화파 군인들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슬로건이 된다. 그녀는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1976년 프랑코 사망 후에야 스페인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1977년 치러진 총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는데 당시 나이 82세였다. 그녀가 열렬히 선거운동을 벌이고 연설하고 뛰어다녔던 선거가 1936년의 2월이었으니 꼭 그 나이의 절반인 41년 전이었다. 41년 전 국회의원이 됐던 마흔한 살의 여인은 나이 여든둘의 할머니가 돼 다시 국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