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8일

코마네치,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세계 체조사상 첫 10점 만점 기록

산풀내음 2017. 6. 11. 17:06

19767 18,

코마네치,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세계 체조사상 첫 10점 만점 기록

 

 

1976 7 17일 오후3시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제21회 올림픽 개막식이 거행됐다. 개막식은 오일쇼크로 인한 건축자재 값의 폭등, 노동자의 파업, 공사지연 등으로 메인 스타디움이 미완성인 채 열렸다. 럭비팀을 남아공에 원정시킨 뉴질랜드의 경기참가에 항의하는 22개의 아프리카 국가가 경기를 보이콧해 참가는 94개국 선수 6941명이 출전했다.

 

다음 날인 7 18일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장. 1m 53cm 39kg, 가냘픈 14세 소녀가 2단 평행봉에서 현란한 연기를 펼치고 사뿐히 착지했다. 소녀가 자신만의 특별한 기술인 코마네치 내리기로 완벽하게 땅에 착지하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요정과 같은 소녀의 마법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마법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경기점수가 전광판에 오르자 장내는 순간 술렁였다. 그토록 완벽한 경기를 펼친 소녀의 점수는 고작 1.00 사람들은 당황했다. 루마니아의 체조코치 벨라 카롤리가 어이없는 점수에 항의를 하기 위해 거칠게 일어섰다. 그때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열 손가락을 펴 보이며 일어나 외쳤다. “1점이 아니라 10! 10점 만점에 10점이오!”

 

그때만 해도 ‘체조 만점’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전광판은 최대 9.99점까지 나오게 되어 있었다. 그 어떤 이견도 없이 심사위원 전원 10점이었다. 이로서 루마니아 국가대표 체조선수 나디아 코마네치(Nadia Elena Comăneci, 1961. 11. 12 ~ )는 세계에서 최초로 10점 만점에 10점을 받은 선수로 기록되었다.

 



 

코마네치는 그 후에도 여섯 번이나 만점을 더 받아 2단 평행봉과 평균대, 개인종합에서 금메달 3개를 거머쥐었다. 미국의 타임지는 코마네치를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 극찬했다. 그녀의 완벽한 경기는 여성 체조를스포츠 예술로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코마네치는 개인종합, 평균대, 2단 평행봉에서 금메달을 따내 3관왕이 되었고 마루운동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녀의 활약으로 조국 루마니아는 체조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5개의 메달을 따낸 것이다. 그리고 4년 뒤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더 땄다.

 




 

 

나디아 코마네치는 1961년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에서 기계공인 아버지와 노동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나디아는 희망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6살 때 카롤리의 체조학교에 들어간 코마네치는 하루 평균 8시간 이상의 훈련이 요구되었으며 체조에 적합한 작고 유연한 몸을 만들기 위해 식사는 엄격하게 제한됐다.

 

코마네치의 선수 생활은 8살이 되던 해인 1969년 루마니아 전국 청소년 체조선수권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72년 공산주의 국가연합 청소년 체조선수권대회에 참가하면서 국제무대에 데뷔하였는데 이 대회에서 그녀는 3개의 금메달을 따냈고 이후 1973, 1974년 대회에서는 전 부문에서 우승을 기록했다. 청소년이 아닌 일반 선수자격으로 참가한 1975년 세계 대회에서는 당시 가장 촉망 받는 체조선수였던 소련의 투르시체바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이때 그녀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딴 체조 기술인 코마네치 내리기를 완성하였다. 이 기술은 반바퀴 비틀어 뒤로 공중돌기를 하며 착지하는 고난이도의 기술이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의 성공 이후 코마네치는 벨라 카롤리 코치를 떠나 루마니아의 수도 부크레슈티로 간다. 이후 그녀는 방만한 생활로 살이 쪘고 선수로서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2년 뒤 절망에 빠진 그녀에게 벨라 카롤리가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재기에 성공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평균대와 마루운동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했다. 그리고 1984년 세계선수권과 올림픽에서 21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스포츠 광장에서 은퇴하였다.

 

당시 루마니아는 차우세스코의 실정으로 상당한 경제적 위기에 빠져있었고, 코마네치 또한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즈음 그녀의 스승인 벨라 카롤리가 차우세스코 정권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미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이후 코마네치에 대한 감시는 강화되었다. 차우세스코 정권에 소모만 당하고 사는 자신의 삶을 되찾겠다는 의지로 스물 여덟 나이에 그녀는 망명을 결심한다. 1989 11월 추운 겨울밤 코마네치는 루마니아 출신의 미국 시민권자였던 콘스탄틴 패니의 도움으로 얼어붙은 벌판을 몇 날 며칠을 헤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애초 코마네치의 망명을 도운 콘스탄틴 패니의 의도는 100% 순수하지 않았다. 패니는 코마네치를 철저하게 상업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녀는 콘스탄틴 패니가 잡아오는 싸구려 행사에 천박한 화장을 하고 나가야 했으며 그때마다 서툰 영어 때문에 면박을 당하고 오해를 샀다. 그녀에게 동정적이었던 일부 언론도 그녀를 외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결국 콘스탄틴 패니와도 결별하고 캐나다에서 칩거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그녀에게 뻗은 구원의 손길의 주인공은 그 자신도 체조선수이며 올림픽 금메달 3관왕인 버트 코너였다. 버트 코너는 은퇴 후 자신이 하고 있는 스포츠 관련 사업에 코마네치가 동참해줄 것을 제안했다. 미국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녀를 이용해왔던 사람들과 달리 버트 코너는 동등하고 정당한 사업파트너로 그녀를 존중했다. 둘 사이에 애정도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마네치와 버트 코너 두 사람 다 서두르지 않았다. 망명 후 사람들로 인해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은 코마네치는 자신의 사랑에 조심스러웠고 버트 코너는 그녀의 그런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4년간의 기다림 끝에 1996년 마침내 나디아 코마네치는 버트 코너와 루마니아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Bart Conner and Nadia Comaneci

In 2008, Comaneci was honored at the Laureus World Sports Awards for her career achieve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