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26일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산풀내음 2017. 6. 17. 23:54

19507 26,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사슴이 숨어 있는 부락이라 하여 녹은(鹿隱)으로 불리다 일제강점기 때 부락 이름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노근(老斤)으로 바뀌었다. 이 마을에서 맨 처음 목화를 재배했다고 해서 목화실(목화곡)로도 불린다.

 

사슴이 숨어 살 만큼 아늑한 이 마을에서 1950 726일 끔찍한 범죄가 벌어졌다. 노근리 사건은 영동읍 임계리에 한 무리의 미군이 통역을 앞세우고 들이닥치면서 시작된다. 통역은 미군이 사람들을 후방에 있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줄 것이라며 사람들을 집합시킨다. 미군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수색해 200명을 모은다. 미군은 옆 동네 주곡리에서도 사람들을 모아 모두 500~700명의 피난민 대열을 만든다.

 

본격적인 학살은 피난민들이 노근리 쌍굴 근처에 이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미군은 철로 위에서 피난민들의 짐을 샅샅이 검사했다. 그러다 어디론가 무전을 친 뒤, 짐 검사를 멈추고 사라진다. 얼마쯤 지나자 남쪽 하늘에 폭격기 두 대가 날아와 철로 주변에 있던 피난민들을 향해 폭탄을 투하한다. 지상의 미군들도 기관총을 쏘며 가세했다. 그 첫 번째 학살로 100명 가까운 피난민들이 죽었다. 미군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비행기 폭격이 끝나자 미군들은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확인 사살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쌍굴로 몰아넣었다. 그때부터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할 일들이 벌어졌다.

 

미군은 굴 안에서 사람들이 조금만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도 총격을 가했다. 사람들은 우는 아기들을 타박했다. 전춘자(당시 10) 아버지는 아기를 조용히 시키라는 사람들의 성화에 자신의 어린 외아들을 굴 속 개울물에 밀어 넣어 죽였다. 찌는 듯한 무더위와 갈증을 못 이긴 사람들은 핏물 범벅이 된 개울물을 퍼 마시기도 했다. 서쪽 굴에 졸졸 흐르던 물은 시체 더미에 막혀 핏물 웅덩이를 이루었다.

 

"난 그때 목마름을 못 이겨, 시체가 둥둥 떠 있는 핏물을 쭉쭉 빨아 먹었습니다."

김학중 당시 19

 

"엄마한테 물을 떠 드리려고 가 보니까 웅덩이 물 위에 피인지 기름인지 두꺼운 막이 생겨 있었어요. 그걸 밀치자 핏덩이가 마치 마른 진흙덩이처럼 갈라졌고 그 밑으로 흐르는 핏물을 뜰 수 있었어요."

양해찬 당시 10

 

쌍굴에는 모두 400~500명의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미군은 그곳을 향해 시도 때도 없이 기관총을 쏘아댔다. 더위와 갈증,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굴 밖으로 기어 나오는 사람은 가차없이 사살했다. 동맹국 군인이 주둔국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그 모순적인 상황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일일까?

 

그때 대학 2학년이던 정구일이 미군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양민이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이는 것이오?"

"대전에서 피난민을 가장한 인민군에게 우리 미군이 엄청나게 당했다. 따라서 의심스러운 피난민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엄명이 떨어졌다."

"우리가 어딜 봐서 의심스럽다는 거요? 우리는 양민이오. 제발 상부에 잘 얘기해서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가게 해 주시오. 부탁이오."

 

당시 이곳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려던 미군 1기갑사단 예하부대는 “미군의 방어선을 넘어서는 자들은 무조건 적이므로 사살하라. 여성과 어린이는 재량에 맡긴다”는 명령을 받고, 대규모 학살을 벌인 것이다. 29일까지 3일간 계속된 만행으로 135명이 숨을 거두고 47명이 부상을 입었다.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노인,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신원이 확인된 ‘공식’ 희생자일 뿐이고, 실제 희생자는 4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미군에 의해 500여명이 사살된 베트남전 당시 ‘미라이 학살사건’ 다음으로 희생자가 많은 사건이었다. “피난민 중에 북한 군인이 위장해 숨어있을지도 모르니 이들을 일단 적으로 간주해 적절한 행동을 취하라”고 지시한 당시 미군사령부의 기록도 발견됐다.

 

처음부터 이 사건이 공개된 것은 아니었다. 군인신분이라 진급실패를 우려한 가해자들의 은폐로 오랫동안 덮여 있었지만, 1960년도에 노근리 사건으로 아들과 딸을 잃은 정은용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 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 정은용은 사건을 토대로 한 실록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하자 AP통신 등의 외신과 국내 언론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취재하여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을 알린 AP통신 기자는 그 해에 폴리쳐상을 수상했다.

 

1999년 유족들이 미국을 방문, 미 육군성은 사건의 대한 철저한 조사와 유족들에 대한 보상문제를 밝혔고, 2000 1월에는 미국에서 대책단과 자문위원단이 내한하여 충북 영동군 사건 현장을 찾아 주민들의 증언과 요구사항을 들었다. 2001 1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하여 사건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미 국방부가 2001 1월 발표한 '노근리 사건 진상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피난민들 틈에 섞여 적이 숨어 들어오는 데 당황한 병사들이 우발적으로 발포해 일어난 사건으로, 상부의 명령 없이 이루어진 '비계획적 살상'이라고 결론지으면서 궁극적인 책임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AP 통신은 노근리 외에도 지휘관들이 피난민에 대해 무차별 발포를 승인한 사실을 보여주는 문서를 19건이나 찾아냈다고 보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의혹으로만 제기돼 왔던 미군의 양민학살 사건들 상당수가 사실이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할 수 있을지 주목되는 상황이다. 이에 더하여 드러나는 잇단 증거들에 따르면 그 살육의 의도된 계획에는 비단 미군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고귀관계자들이 참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들이 주민에게 대피하라고 모아놓고 대학살을 벌였던 노근리 터널

미군의 기관포 탄환 자국들 앞에서 학살 당시를 설명하는 주민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게 학살당한 영혼들의 명복을 비는 위령제를 지내는 노근리 주민들이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