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5일

마릴린 먼로의 사랑과 죽음

산풀내음 2017. 7. 1. 06:52

1962 8 5,

마릴린 먼로 사망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마릴린 먼로의 죽음_여공에서 세기의 스타로, 그리고 죽음
https://www.youtube.com/watch?v=_6qL9DkJPAc&t=15s

 

50여 년 전, 지구촌 남성들의 마음을 빼앗은 한 여인이 있었다.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 6월 1 ~ 1962 8월 5). 온갖 수식어가 필요 없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오르는 여성미의 대명사였던 그녀가 1962 8 5일 로스엔젤레스 자택 침실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녀의 나이 36세였다. 그녀는 이전에도 두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으나 제때에 전화를 걸어 간신히 생명을 건진 적이 있었다. 먼로의 시신는 그 집 하녀가 발견했는데 발견 당시 먼로는 침대 위에서 손으로 전화기를 움켜진 채 죽어있었고 유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모턴슨(Norma Jeane Mortenson)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찍이 생부의 의무를 포기했고 어머니에게서 양육되었다. 어머니 글래디스는 화학약품을 다루는 일을 하는 비정규직으로 생활을 했고 노마 진이 자산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글래디스의 미모는 노마 진이 할리우드 배우가 되는 밑바탕이 되었지만 글래디스로 인한 어린 시절 불행한 삶은 노마 진의 불행한 죽음에 원인이 되기도 한 것이다. 글리디스는 결국 우울증과 약물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노마 진은 고아원을 거쳐 위탁가정에 가게 된다.

 

하지만, 그의 수양 아버지가 노마 진 베이커를 바라보는 욕망 어린 눈빛에 불안해진 수양 어머니는 그를 겨우 열여섯의 나이에 서둘러 짐 도허티와 결혼시킨다. 남편을 얻은 그는 처음으로 믿고 의지할 데가 생긴 듯 행복해 했지만 그들은 너무 어렸고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이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집을 떠난 후 노마 진 베이커는 독립해 군수공장에 취직하고, 그곳에서 군 사진 작가인 데이비드 코너버의 눈에 띄어 잡지 모델이 된다.

 

 

Marilyn Monroe with her first husband, James Dougherty

 

 

 

 

잡지 모델 시절

 

1946, 그녀는 사진 작가의 충고를 받아드려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자신의 꿈에 더 다가서기 위해 짐 도허티와 이혼했다. 1946년 늦은 여름, 그녀는 폭스 스튜디오와 마침내 계약을 맺었다. 더 매혹적인 이미지를 원했던 스튜디오 관계자가 노마 진 베이커 대신 마릴린이란 이름을 제안했다. 그녀는 코와 빰 성형 수술을 받고 어머니의 처녀 때 이름을 따서 마릴린 먼로가 되었다. 전설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탄생한 것이다.

 

 

 

성형 전후

 

그러나 이후 5년 동안 그녀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때부터 우울증에 시달렸고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해다. 1952년 그녀에게 기회가 왔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를 통해 마릴린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극중 금발의 로렐라이 역을 한 그녀는 로렐라이의 여성스럽고 코믹하며 남자를 밝히는 이미지가 곧 마릴린 먼로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그 해 마릴린 먼로는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1954 1,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했다. 그러나 조 디마지오의 폭력 행사로 둘은 결혼 9개월 만에 이혼하게 된다.

 

 

 

 

 

 

Gentlemen prefer Blondes

 

It's Marilyn And Joe Day. This day 1954: Actress Marilyn Monroe married Mr. Coffee, baseball legend Joe DiMaggio, in San Francisco

 

그녀는 1956년 7월 '세일즈맨의 죽음'을 쓴 극작가이자 공산 당원인 아서 밀러와 3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아서 밀러와의 결혼은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과의 만남이었기에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아서 밀러는 마릴린 먼로의 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녀를 걱정하고 위로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싹트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먼로는 결혼 이후 아서 밀러의 종교인 유대교로 개종까지 하는 등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먼로는 스타 시절부터 겪어온 신경쇠약 등으로 결혼 후 4년 동안 그녀는 2번의 유산을 겪었고 또 다시 자살을 시도했다. 결국 1960년에 둘은 이혼했다. 그녀는 다시 헐리우드로 돌아왔지만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다. 마릴린은 술과 마약, 그리고 약에 찌들어 살았다. 1960년부터 마릴린은 정신과 의사 그린스에게 많이 의지했고 그의 상담 없이는 일상 생활이 힘들 지경이었다.

 

 

 

Marilyn Monroe and Arthur Miller

 

1962 8 5, 마릴린의 집에서 그녀의 시체가 발견 되자 전 세계의 언론은 그녀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마릴린 먼로가 자살했다는 정부의 공식발표에도 불구하고 곧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의문이 제기되었다. 수많은 세간의 주목을 받은 자살임에도 마릴린 먼로의 죽음에 관한 증거는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그 기록은 겨우 파일 한 장 분량이었다. 자살 당시 마릴린의 침실 원본 사진은 분실됐고 선명하지 않은 인쇄판만 지금 남아있다. 또한 마릴린의 위에선 약의 잔여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그녀를 처음 발견한 의사들은 바로 신고하지 않고 30분이 지난 4 25분에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먼로의 시체가 발견된 방은 범죄현장으로 보존되지 않았다. 명확한 증거의 부족으로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에 대해 음모론의 지지자들은 로버트 케네디( F. 케네디의 동생)가 비밀을 폭로하려는 마릴린 먼로를 살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전부터 마릴린 먼로와 존 F. 케네디 대통령,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 세 사람 사이에는 스캔들이 늘 따라다녔다.

 

 

 

 

스켄덜의 주인공 들, F.케네디 / 마릴린 먼로 / 로버트 케네디

 

마릴린 먼로와 존 F.케네디의 사랑(?)

 

이와 관련하여 2014 5 16일 영국의 데일리메일인터넷판은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당시 미국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가 주도한 약물 살해라는 내용을 담은 신작 도서를 소개했다.

 

책에 따르면 로버트 케네디는 1962 84일 매제이며 영화배우인 피터 로퍼드, 로스앤젤레스 경찰 출신 개인 경호원 등 두 명을 데리고 먼로의 집으로 찾아가 먼로에게 최면제의 일종인 펜토바르비탈(약품명 넴부탈)을 주사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먼로가 정신을 잃은 사이 비밀내용을 담은 먼로의 일기장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먼로가 깨어날 것 같자 이들은 또다시 넴부탈을 주입했다.

 

먼로의 애완견이 짓는 소리에 방을 들여다본 집사가 현장을 발견하고 앰뷸런스를 불렀는데, 당시 출동한 구급대원은일반적인 약물 과다 복용자와 달리 구토하지 않았고 입에서 약물 냄새도 나지 않았다면서 먼로가 의식은 없었지만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먼로의 정신과 주치의인 랠프 그린슨이 나타나 거대한 주사기로 먼로의 가슴에 넴부탈을 주사하면서 먼로가 결국 숨지게 됐다는 것이다. 주치의 그린슨 또한 먼로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런 사실은 로버트 케네디한테 약점으로 잡혀 있었다.

 

로버트 케네디가 뇌물로 앰뷸런스 구조원들의 입을 막았고, 먼로의 죽음은 역시 은폐에 가담한 의사들의 도움으로 자살로 결론지어졌다고 주장했다. 사건 당사자들인 존 에프 케네디는 1963, 로버트 케네디는 1968, 랠프 그린슨은 1979, 케네디가에 밀회 장소를 제공했던 피터 로퍼드는 1984년 숨져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