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

산풀내음 2017. 7. 1. 09:33

1945 8 6,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

 

1945 8 6일 오전 81530. 서태평양 티니안섬 기지를 출발한 B29 `에놀라 게이(ENOLA GAY)`가 히로시마 상공 9600m 지점에서 원자폭탄을 투하, 인구 30만 명의 이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참상이었다. `에놀라 게이` B29 조종사 티베츠 대령의 어머니 이름에서 딴 이름이고, 지름 71, 길이 3.05m, 무게 4t의 원폭 1호는 `리틀 보이(little boy)`로 불렸다.

 

Enola Gay after Hiroshima mission, entering hard-stand.

Loading 'Little Boy' bomb into B-29 bomber 'Enola Gay

 

이날 히로시마는 오전부터 구름이 짙게 낀 날씨였다. 공습경보가 한 차례 지나가고 시민들이 막 일상으로 돌아가던 때, TNT 화약 12500t 상당의 원폭이 도시를 강타하자 오렌지빛 섬광과 엄청난 불덩이가 치솟으며 도시의 60%가 파괴됐고 폭심지(爆心地)로부터 반경 500m 이내의 모든 생명체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부조종사가 “오, 하느님,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나이까?”라며 안타까워했다지만 부질없는 탄식이었다. 24만 명이 방사능과 고열, 그리고 후유증으로 죽어갔다.

 

An aerial photograph of Hiroshima shortly after the atomic bomb

Hiroshima after the US atomic bombing.

 

원폭 투하 직후 미국은 일본 전역에 전단지를 뿌리며 원폭 투하 사실과 함께 그 피해를 알렸고 또한 항복을 권유했다. 다음날 트루먼 대통령도 "경이로운" 무기의 존재를 미국 국민과 전세계에 알리면서 일본에 경고했다. 그러나 일본은 히로시마가 피폭당하고도 항복을 선언하지 않았다. 이미 미국의 가공할 재래식 폭격에 익숙해 있었던 탓이 컸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다른 재래식 무기에 의한 공격과 비교할 때, 일본 지도부에게 항복을 선택할 만큼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한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일본 지도부는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고 이를 공식 확인한지 이틀이 지나도록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최고위원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히로시마 피폭 사흘 후인 8 9일 새벽,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에 있는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는 일본의 항전 의지나 소련의 중재에 의한 종전 희망은 물론이고, 소련의 개입 없이 태평양 전쟁을 끝내려고 했던 미국의 의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8 9일 새벽 소련의 참전 소식을 접한 일본 지도부는 즉각 최고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회의가 시작되었을 즈음, 미 공군의 두 번째 폭격기가 고쿠라 기지를 향해 출격했다. 그러나 악천후와 피격 위험을 느낀 폭격기 조종사는 기수를 나가사키로 돌려, 무게 4.5톤의 '팻 맨(fat man)'을 투하했다. 21킬로 톤의 폭발력을 보인 이 핵폭탄 한발로 1946 1월까지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Bombing of Nagasaki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버섯 구름


The aftermath of the detonation of Fat Man over Nagasaki in Japan

 

예상과 달리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자 추가적인 원폭 투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트루먼은 승인하지 않고 대신 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재래식 폭탄을 퍼부었다. 한편 소련의 참전으로 일말의 희망마저 잃게 된 히로히토는 8 15일 일본 전국에 중계된 라디오 연설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9 2, 미국 항공모함 미조리호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을 가졌다. 1941 12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Formal Surrender of Japan, 2 September 1945

 

그리고 원폭의 참상을 전해든 맨하탄프로젝트의 수장 오펜하이머는 그 후 회환과 좌절 속에서 살았다. 당시 트루만 대통령을 찾아가각하 내 손에 묻은 피가 지워지지 않습니다라며 울먹거렸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를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렇다. 이뿐만이 아니다. 물리학자 그리드는 아예 전공을 물리학에서 생화학으로 바꿔버렸다. 덴마크 출신으로 당시 세계 물리학계의 어른이었던 닐스 보어는 맨하탄프로젝트에 참가했으면서도 원자폭탄 개발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왔다. 원자폭탄 개발에 참가했던 상당수의 물리학자가 원자폭탄보다 더 큰 위력의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했으나 일부 과학자들은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