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3일

베를린 장벽 설치

산풀내음 2017. 7. 8. 05:51

1961 8 13,

베를린 장벽 설치

 

2 세계대전연합군의 승리로 임박한 시점인 1945 2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연안에 있는 소련의 휴양도시 얄타에서 연합군이 모여 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였고 그 결과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분할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독일의 상징인 수도 베를린 역시 분할에 포함되었고 그 결과 동독 안에 위치한 베를린이 4분할되었다.

 

패전 3개월 후인 1945 7. 브란덴부르크 주변의 풍경. 한때 나치당원들이 행진하던 저 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독일을 동, 서로 나누는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면서, 통일이 될 때까지 28년 동안 고통 받았다.

 

이런 상황 하에서 1947 3 12일 트루먼은 "무장한 소수 또는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저항하고 있는 자유국가 국민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 트루만 독트린을 발표하였고, 나아가 같은 해 6 5일에는 전후 유럽 경제 부흥계획인 마셜 플랜이 공표되었다. 특히 1948 4월 미국 의회의 승인을 받은 마셜 플랜은 1952년까지 약 13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원조가 유럽에 지원되었다.

 

한편 미·영·불 서방 3개국이 자신의 점령지역을 통합해 단일 경제공동체로 하고 베를린을 포함한 통합 전 지역에 새로운 통화인 마르크화()를 유통시키기로 한 것이 빌미가 되어 소련은 1948 6 24일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육로를 봉쇄하는 베를린 봉쇄를 감행하지만 미국의 대규모 항공 수송을 통해 봉쇄를 무력화시키자 마침내 1949 5 12일 육로 봉쇄를 해제시키게 되었다.

 

Berlin Blockade

 

한편 행정적으로 분리되었지만 베를린 시민들의 왕래는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셜 플랜 등에 의한 동, 서간의 경제력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해졌고 그 결과 1949년 동독정권 수립이래 매년 20만 명, 1961년까지 이미 250만 명이 경계를 넘은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전문직과 숙련노동자의 탈출이 심각해 자칫하면 고급 두뇌의 공백으로 동독의 기술, 산업기반이 붕괴될 판이었다.

 

한편 1959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루시초프는 서베를린을 독립시켜 독자적인 경제와 정부를 갖는 "자유 도시"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고 하지만 서방측이 이를 거부하자 1961 6월 흐루시초프는 "베를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긴장은 고조됐고 이로 인해 서베를린으로의 탈출 러시가 가속화됐다. 7월 한 달 동안만 3만 명이 고향을 등졌다.

 

그리고 1961 8 13일을 시작으로 베를린을 잇는 13개 도로와 80개 통로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었다. 장벽은 폭 50m의 완충지대가 있는 66㎞의 이중철망과 55㎞의 단선철망, 25㎞의 콘크리트벽 등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동서 분단과 냉전체제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이 1989 11 9일 마침내 붕괴됐다. 동독내의 개혁열기가 비등하고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대규모 이주가 계속되자 동독 스스로 분단의 벽을 허문 것이다.

 

장벽 설치 이전의 경계구역 표시


1961 11 20, 동독 노동자들이 장벽을 건설 중인 모습

 

동서독의 화해분위기는 이미 지난 1963 12 25일 크리스마스를 기해 베를린장벽을 일시 개방,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간 인적 교류 즉, 주민왕래를 실현시키면서 시작됐다. 이것은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은 분단국 최초의 자유왕래였다. 이를 계기로 양측간에 설치된 ‘철의 장막’은 차근차근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동서독은 교류협력을 통한 민족공동체 의식을 공고히 해나갔다.

 

첫 인적 교류가 이루어진 지 1년도 채 안돼 동서독은 1964년 부활절을 계기로 자유왕래를 실시하기에 이른다. 1964년 서독은 서독국민이 제한 없이 동독 내 어느 지역도 방문할 수 있다고 선포했고 동독은 60세 이상 연금수혜자에게 서독방문을 허용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존 에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1963 6 26체크포인트 찰리에서 장벽을 둘러보고 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의 대표적인 관광명소 중 하나가 되었다

 

양 독일간의 꾸준한 교류가 계속되는 가운데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 정책을 펼치고 동구권에 민주화 개방화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동서독 통일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1989 5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쪽 국경을 개방하면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몰려들면서 동독의 체제 붕괴는 시간문제가 됐다. 여기에 피난민을 10만 명으로 예상한다는 서독 콜 총리의 발언이 알려지자 동독에서의 탈출은 현대판 엑소더스로 발전했다.

 

동독의 각 도시에서도 연일 반정부 데모가 이어졌다. 10 2 1만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민주화 시위에 유화적인 에곤 크렌트가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면서 더욱 거세졌다. 시위세력은 10 30일에는 50, 11 4일에는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마침내 119, 소련은 동독에 비공산 정권이 들어서도 용인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그날 저녁 7시 동독 정부는 베를린 장벽을 포함해 모든 경계를 전면 개방한다고 발표했다. 동베를린 시민들은 밤10시부터 검문소를 넘기 시작했다.

 



 

이후 통일 협상을 시작해 1990 8 31 45개 조항으로 이뤄진 통일조약에 서명했고 5주 뒤인 10 3일 협정이 발효됐다.

 

 


'역사속에 오늘, 8월 > 8월 13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투부대 월남파병안 국회 통과  (0) 2017.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