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3일

전투부대 월남파병안 국회 통과

산풀내음 2017. 7. 8. 05:55

1965 8 13,

전투부대 월남파병안 국회 통과

 

1964 8 2일 이른바 월맹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이를 이유로 8 7일 월맹에 보복을 선언한 통킹만 결의를 의회에서 의결하였으며, 1965 2월부터 본격적으로 군사개입을 강화하여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통킹만 사건은 미국이 스스로 조작한 사건임이 이후에 밝혀졌다.

 

1961 11, 5.16 군사정변 직후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이 원한다면 병력을 월남에 파병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할 경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도발할 가능성과 중국, 소련 등의 공산권 국가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통킹만 사건 등 베트남에서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1965 2월에 케네디를 승계한 린든 존슨 대통령은 한국에 전투병력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이전에도 비 전투병력 파견 요청 및 파견은 있었다. 먼저 1964 5 9일 미국이 1개 이동 외과병원을 파병해 주도록 요청을 했고 국방부는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과 10명을 편성된 태권도 교관단 등 140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7 31일 국회 동의를 받고 9 11일 파병했다. 이후 통킹만 사건이 발발하자 1964 12 18일 미국은 후방지원부대 파병을 요청했고 1965 3 10 2차로 파병하였다.

 

1965 3월 한국과 미국은 파병 협상을 하였고 5 17일에서 18일까지 워성턴에서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타결되었다. 이후 6월 키 월남수상이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15천명 규모의 한국전투부대를 월남에 파병해 주도록 요청했으며 한국정부는 7 2일 해병1개 연대와 육군2개 연대를 월남에 파견하는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키로 결정했다. 이런 정부의 결정에 야당과 학생들은 반대 데모를 벌였고, 민중당 국회의원들은 7 16일 일괄사퇴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투부대 파월동의안은 8 13일 야당의원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방부는 수도사단과 해병대 제2여단을 파병부대로 선정하고, ‘맹호부대청룡부대로 각각 명명하였다. 9월 25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수도사단장 채명신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0월 9 청룡부대는 남베트남 깜란에 상륙하여 9 20일부터 주월한국사령부가 사이공에서 문을 열었고, 11월 1 맹호부대가 뀌년에 상륙을 하였다.

 

1964 9월 11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4월까지 4차에 걸친 파병으로 총 32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베트남 전쟁에 동원되었다. 한국군의 파병은 미국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백색 제국주의가 아시아를 침략했다는 비판을 완화시켜주는 등 전체적인 효과를 차치하고라도, 경제적인 면에서도 미국은 전쟁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한국군 1명의 연간 유지비가 5,000달러인 반면, 미군 1인당 유지비는 1 3,000달러였으니 그 차액 8,000달러를 파월 한국군 연인원 32만으로 곱하면 미국은 무려 25억 달러 이상의 전비를 절감한 것이다.

 


출항을 준비하는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장병들









'역사속에 오늘, 8월 > 8월 13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를린 장벽 설치  (0) 2017.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