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1일

필리핀 야당 지도자 아키노 피살

산풀내음 2017. 7. 15. 18:32

19838 21,

필리핀 야당 지도자 아키노 피살

 

1983 821일 오후1, 45발의 총성이 필리핀 마닐라공항에 막 착륙한 중화항공 여객기 주변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여인이 “군인들이 니노이를 쏘았다”고 부르짖었다.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가 피살된 것이다. 잠시 후 항공기 정비사 모습을 하고 있는 20대 청년도 군인들이 쏜 수발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 쓰러졌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정부는 아키노는 롤리(Rolando "Rolly" Galman)라는 이름의 공산주의자인 청부살인업자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자와 정부와의 연관성은 없다고 발표했지만, 이 발표를 믿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정부측 발표)

 

그리고 야당 측이 발표한 목격자들의 증언은 달랐다. 아키노를 태운 여객기가 공항에 도착한 뒤 아키노를 호위하려고 비행기에 올라탄 3명의 무장한 보안요원들 중 한 명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 또한 다른 보안요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정부의 부인과는 상관없이 당시의 상황을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받아 들여졌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니노이 아키노. 군인들이 호송하고 외신기자들은 따라 내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Benigno Ninoy Aquino, 1932 ~ 1983)17세의 나이에 학교를 떠나 한국전쟁 종군기자로 활약했다가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당시 반정부 단체의 지도자 루이스 탈크를 설득해 투항시키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임무를 부여 받고 4개월간의 설득 끝에 결국 그들 투항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를 통해 명성을 얻은 아키노는 1954년 불과 22세의 나이로 고향 콘셉시온 시의 시장이 되었고, 27세엔 부지사, 29세엔 도지사, 34세엔 상원의원이 됐다. 모두 최연소 기록이었다. 그리고 시장 시절 코라손 코후아코라는 연인을 만나 결혼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코라손 아키노이다.

 


 

아키노의 비극은 그가 1971년 자유당(Liberal Party)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그를 경계한 정적 마르코스(Ferdinand Emmanuel Edralin Marcos, 1917-1989) 대통령은 19729 21일 계엄령 선포한 후 아키노를 정부 전복혐의와 불법무기 소지라는 이유로 체포해 투옥시켰다. 아키노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국민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던 그를 마르코스는 차마 사형까진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2오일쇼크로 필리핀의 경기침체가 가속화되자 마르코스 정권에 대한 비난여론이 더욱 거세졌고, 아키노 전 상원의원을 석방하라는 야당의 정치적 공세 또한 강력해졌다. 결국 야당의 정치적 공세에 떠밀려 마르코스는 1980 5월에 아키노를 석방하고 미국과의 합의 끝에 아키노를 미국에 수술 차 보낸다는 명분으로 사실상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아키노()와 독재자 그리고 살인자 마르코스()

 

미국 망명시절 아키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인연을 가지게 된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두 정치인은 친분을 쌓았고, 아키노는 아끼던 수동 타자기를 김 전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이 타자기는 현재 김대중 도서관에 전시되어 있다.

 

1981년 계엄령이 철회되고 마르코스가 이해할 수 없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아키노는 마르코스 독재 비판을 계속하며 필리핀 내 야당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귀국을 결정한다. 아키노는 투옥 또는 암살될 것이라는 거듭되는 경고와 협박을 받았다. 하지만 1983 8월 아키노는 3년 만에 귀국 비행기에 오른다. 당시 50세였던 아키노는 당시 기내에 동승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리적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암살이란 것이 공공 서비스의 하나인 나라니까요.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겠죠. 암살자의 총탄에 죽는 것이 내 운명이라면, 그렇게 되라죠.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한 것이었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8 31, 아키노의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무려 20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아키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시민들의 분노는 아키노의 장례식 이후 폭발했다. 수도 마닐라는 물론 전국에서 반마르코스 시위가 일어났고 부유층부터 슬럼가의 빈민들까지 모두 시위에 가세했다. 여기에는 아키노 암살을 다룬 해외 언론의 다큐멘터리가 필리핀 내에서 몰래 상영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해외 언론들은 연일 마르코스와 마누라 이멜다의 사치와 부패상을 보도했고 이는 그대로 필리핀에 유입되어서 반마르코스 여론을 더욱 키웠다. 엄청난 역풍에 마르코스는 결국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대통령 선거를 통해 재선에 성공해 역풍을 잠재우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가 반마르코스 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코라손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반마르코스 운동을 벌였고 국민들은 코라손을 적극 지지했다.

 

1986 필리핀에서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서 베니그노 아키노 2의 미망인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가 야당 단일 후보로 출마했다코라손의 당선이 유력했지만, 마르코스는 개표를 지연시키면서 부정을 저질렀고 마침내 1986 2 7, 필리핀 선관위는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국민적인 여론과는 배치되는 것이었고 다시금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르코스는 군을 동원해서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민중들의 격렬한 분노를 접한 군부는 마르코스에게 등을 돌렸다. 후안 엔릴레 국방장관과 피델 라모스 부참모총장 등은 마르코스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군부가 친아키노 진영과 친마르코스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고 유혈충돌의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상황이었다. 2 25일 마르코스는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다음 낢 미국의 설득을 받아들여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아키노 정권라모스 정권 하에서 진상조사단이 구성되어 그의 대통령 재임기간 중, 마르코스와 그의 가족, 친지, 측근들의 뇌물 수수와 횡령 등 여러 가지 부정적인 수단으로 필리핀 경제를 유린해왔으며 그 규모가 수십 억 달러에 달한다는 증거들이 계속 밝혀지거나 폭로, 진술이 계속되었다. 얼마 뒤 마르코스와 이멜다는 미국정부에 의해 밀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989 9월 28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향년 72세에 심장병으로 죽었다.

 

필리핀제 천하의 잡놈과 잡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