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5일

프랑스군, 파리 해방시켜 …(파리해방)

산풀내음 2017. 7. 16. 19:41

19448 25,

프랑스군, 파리 해방시켜

 

파리는 2차 대전 당시인 1940 6 14일 나치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 4년이 지난 1944 6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연합군이 프랑스 영토를 속속 탈환하고 진격해오면서 그 해 8 25일 해방(Liberation of Paris, also known as Battle for Paris)을 맞았다.

 

노르망디 상륙연합군이 프랑스 지역을 재빠르게 탈환하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고립되거나 철수를 시작하며 모든 친독일계 경찰들은 거리에서 사라졌다. 몇몇 반독일 시위가 일어났고, 무장한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활발히 일어났다. 사기가 떨어진 독일군은 대응하지 않았다.

 

1944 8 19일 공산당 계열의 프랑스 해방국내군(French Forces of the Interior)이 파리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파리주둔 독일사령관 폰 촐티츠(Dietrich Hugo Herman von Choltitz, 1894-1966)는 드골과 레지스탕스 지도자에게 휴전을 제의한다. 양측은 휴전에 합의했으나 해방국내군이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양측의 전투는 재개됐다.

 

Dietrich von Choltitz (standing far left) at Trent Park.

 

1944 8 22일 베를린으로부터 파리 사령부로 한 통의 전문이 타전된다. “파리를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지시였다. 전문을 수신한 통신장교는 고민에 빠졌고, 그는 12시간 늦게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그때쯤이면 파리를 파괴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령관도 ‘인류문화의 보고’ 파리를 그의 손으로 파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했다.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도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진격작전이 잘못되면 그 역시 파리를 파괴한 장본인으로 남을 판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파리 진격을 프랑스 제2기갑사단(2nd French Armored Division)에게 맡겼다. 8 24일 프랑스군은 파리에 입성해 자정 직전에 Hotel de Ville에 도달하였다. 이튿날인 8 25일 아침에는 프랑스 제2기갑 사단과 미국 제4 보병사단(US 4th Infantry Division)이 파리로 본격 진격하였고 이에 파리 주둔 독일사령관 폰 촐티츠는 항복한다.

 

1944 8 25일 파리 해방 뒤 프랑스 제 2기갑 사단의 전차와 하프 트랙을 보기 위해 샹젤리제 거리에 모인 프랑스 군중

한편 항복한 독일 고위 장교들이 모여 절망에 빠진 모습. 그들은 전쟁 포로(POW)로써의 대우를 요구했다.

 

런던에 망명해 ‘자유 프랑스’ 운동을 이끌던 샤를 드골 장군은 파리가 해방된 지 몇 시간 만에 달려와 “파리는 침략당했고, 파괴됐다. 그러나 해방됐다. 파리는 스스로 해방됐다”는 연설을 남겼다. 이는 독일의 힘에 무력하게 굴복했던 프랑스가 자존심을 되살리면서 전후 강력한 프랑스를 재건하는 정신적 토대가 됐다.

 

파리로 입성하는 드골 장군

 

자연스럽게 드골을 수반으로 하는 레지스탕스 세력은 프랑스의 건국세력이 되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4년의 독일 점령 기간 동안 10만 명에 달하는 조직원이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무장투쟁을 했으며, 노르망디 상륙이나 파리 수복에서 프랑스국내군(FFI)이라는 정규군 형태로 참전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기 때문에 해방 후에 주도적인 정부 구성과 전후 청산을 할 힘이 넘치고도 남았다.

 



8 25일 파리에 입성한 프랑스와 미국 군대를 환영하는 시민들


미군에게 키스로 감사를 표시?

프랑스의 한 할머니가 미군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있다.

독일군으로부터 노획한 MP 40기관총으로 무장한 18세의 프랑스 레지스캉스 시몬느 스과

 

프랑스는 1944 8월 나치에서 해방된 후 곧 과거 청산에 들어가 약 2년 간에 걸쳐 조국을 배반하고 나치에 협력한 1만여 명의 부역자들을 처형했다. 먼저 나치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의 이념에 동조하고 대독 협력에 앞장선 인사들에 대한 숙청 작업을 단행했다. 모든 분야를 망라한 숙청 작업에서 특히 여론의 관심을 끈 것은 언론인과 문인이었다. 이 작업을 주도한 것은 전쟁 중에 저항 지성인들이 설립해서 지하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였던 단체인 전국작가협의회(전작협)였다.

 

나치 강점기에 친독 성향 신문 및 잡지에 기고한 언론인, 나치와 비시 정부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한 문인들이 표적이었고, 1944 9월초 전작협이 작성한 최초의 명단에 오른 반역지성들은 로베르 브라지약, 루이-페르디낭 셀린, 알퐁스 드 샤토브리앙, 자크 샤르돈, 드리외 라 로셸, 장 지오노, 샤를 모라스, 앙리 드 몽테를랑, 마르셀 주앙도, 사샤 기트리, 뤼시앙 르바테 등 150여명의 우파 작가들과 기자들이었다. 전작협은 어떤 법적 지위나 권한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이 협의회가 작성한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해방 직후의 시대적 분위기에서는 지성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역 지식인의 처벌 수위를 놓고 프랑스 지식계는 치열한 논쟁으로 끓어올랐다. 작가인 프랑수아 모리아크의관용론과 알베르 카뮈의청산론간 격돌이 대표적이었다. 모리아크는 청산론이 프랑스 국민을저항운동가부역자로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지적하고, 정치적 차원을 벗어난 기독교적 사랑과 자비에 호소했다. 반면 카뮈는청산 작업에 실패한 나라는 결국 스스로의 쇄신에 실패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청산론의 중심에 섰다. 당연히 카뮈의 주장이 힘을 얻었다.

 

언론인과 문인이 맨 먼저 도마에 오른 것은 재판부의 의도적 전략이기도 했다. 이 범주의 부역자들은 가장 잘 알려져 있었고, 부역행위의 증거가 가장 명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비시 정부 주역들이 이미 국외로 도망쳐버려 당장 이들을 처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선 잘 알려진 협력자들부터 처벌하면 숙청 지연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의 글은 확실한 물증으로 남아 있어서 신속하게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파리의 부역자재판소에서 재판 받은 작가, 언론인 32명 중 무려 12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 중 7명이 처형되었다. 처형된 7명 중 가장 큰 논란이 된 인물은 로베르 브라지약(Robert Brasillach, 1909~1945)이었다. 1945 1 19일 재판 받을 당시 브라지약은 36세로, 프랑스의 대표적 반유대주의 파시스트 지식인이었다. 이 젊은 작가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아까워한 문화계 인사들은 사면 탄원서를 드골 장군에게 보냈다. 탄원 서명자 59명 중에는철저한 정의를 외쳤던 카뮈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거부되고 결국 2 6일 브라지약은 총살되었다.

 

재판장에 선 브라지약()와 나치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브라지약()

 

그 외에도 대표적인 부역 작가로 논란이 되었던 자로는 드리외 라 로셸과 뤼시 앙 르바테 등이 있었다. 독일 점령 기간에 프랑스의 상징적인 문학잡지인 NRF의 발행인을 맡았던 드리외 라 로셸은 경찰을 피해 은신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나치즘을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극우지 ‘즈 쉬 파르투’의 기자 뤼시앙 르바테는 1944 8월 독일에 피신했다가 이듬해 체포되어 1946 11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52년에 사면되어 풀려났다.

 

정식 절차를 통한 처형 이외에도 즉결 처형을 통하여 나치 부역자들을 처형하였다. 정확한 수는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해방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틱시에가 보고 받은 자료에 따르면 1945년 초까지 채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약 100,000이 넘는 부역자들이 처벌받았다. 이중 가장 일반 적인 것이 머리를 삭발하는 것이었고 독일군과 성관계를 가진 여성은 매춘부일지라도 삭발과 함께 구타까지 당했다. 또한 블랙 마켓과 관련이 있는 자들은 생매장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44년부터 1951년까지 프랑스 법정에서 모두 6,763명이 반역행위로 사형을 선고 받았고 이 중 791건이 실제로 형이 집행되었다. 또한 당시 국적 박탈이라는 형벌이 있었는데 모두 49,723명에게 내려졌다.

 

독일부역자 처단

독일군과 성관계를 가진 프랑스 여성이 삭발 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