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31일

정국은 간첩 사건 발생

산풀내음 2017. 7. 23. 08:35

19538 31,

정국은 간첩 사건 발생

 

1953 8 31일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준장은 연하신문 편집국장 겸 동양통신 편집국장이던 정국은을 간첩과 정부전복음모혐의로 체포했다. 정국은의 혐의는 북한의 조선로동당의 간첩으로서 대한민국 국방부를 출입하면서 군 관련 기밀을 빼냈고, 일부 정치인들과 결탁하여 이승만 정부의 전복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팔, ‘이승만의 양자’로 불린 김창룡(1916 7 18– 1956 1 30)1940초 일본인의 소개로 관동군 소속 헌병보조원의 이력으로 시작하여 소련과 만주국 국경지역에서 항일인사를 감시하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는 1943 9월부터 1945 8 15일 일제 패망까지 불과 2년 사이에 무려 50여 개의 항일조직을 적발했다.


이승만이 너무도 사랑한 친일파 김창룡

 

태평양 전쟁이 종전된 후 고향에 돌아왔다가 치안대에게 구금되었고,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다시 체포되었다. 이때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두 차례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다. 북한에서 살 수 없음을 알고 1946 결국 월남하였고, 전라북도 이리에 있는 국군 제3연대에 신병으로 입대한 후 1947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여수 순천 사건의 진압과 이후 좌익 군인 색출 및 숙청작업을 주도 등을 통해 이승만의 신망을 얻었다. 김창룡은 1950년 여간첩 김수임 사건 조작 수사 등 사건 조작에도 능통하였다. 최초의 ‘빨갱이 만들기 작전’은 1950 10월 그가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취임한 직후 일어났다. 인민군 패잔병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를 삼각산 뒤편에 있던 주민들에게 쥐어주고 이들을 공산분자로 몰았고, 이들이 서울을 습격하려 한다고 꾸며 모두 죽인 사건이다. 이것이 소위 ‘삼각산 사건’이라 한다.

 

1955 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김창룡은 권력 투쟁에 적극 개입한다. 가장 먼저 타깃이 된 이가 정국은이었다. 정국은은 해방직후부터 국제신문, 국제통신, 국방신문, 태양신문 등을 운영했고 연합신문 주일 특파원으로도 활약한 저명한 언론인으로 여수·순천 14연대반란사건에 대한 군 당국의 대응태세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는 등 정부당국의 미움을 많이 받아왔다. 그는 1952 9월 당시의 권력 2인자인 장택상 국무총리를 일본인 밀입국사건과 관련하여 민족반역자라고 보도했다.

 

또한 정국은은 이범석, 원용덕 등과 함께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 출신이었다. 족청은 1946 10월 이범석이 민족정신의 전통을 계승할 청년운동의 모체로 결성된 단체로 이승만의 외곽지원 세력이기도 하였지만 대한청년단과의 흡수 과정에서 이승만의 명령에 단계적인 합류안을 내놓는 등 저항을 하자, 이승만은 1948 1 5일 담화문을 내 족청의 해산을 공식 촉구하였다. 1949 2월 족청은 해산되었고 이범석은 국방장관에서 해임되었다.

 

김창룡은 족청을 밀어내기 위해 1953 8 31일 정국은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정국은이 체포된 지 10일 만에 내각에서 족청 계열 장관 3명이 동시에 파면되고, 곧 자유당에서 족청 계열 거물인사 8명이 제명됐다. 국회 조사위원회까지 구성케 한 `정국은 사건`은 연합신문 사장이었던 족청계의 양우정 의원 구속으로도 확대됐다. 김창룡 반대세력이었던 족청은 순식간에 권력에서 이탈했다. 정국은은 끝내 12 5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1954 2 19일 처형당했다.

 

정국은 처형 직전 모습. 당시 판사였던 태윤기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간첩으로 몰아 죽게 했던 사건인 만큼 인간적으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당시 상부의 의견이 사형 쪽이었고, 언론의 대문짝만한 보도 때문에 여론도 비등해서 사형으로 결정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