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7일

레바논 내전

산풀내음 2016. 8. 16. 22:36

1975 9 7,

레바논 내전상태로 돌입

 

원래 레바논은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마론파)이 많은 그리고 경기도 크기만한 작은 국가였다. 이를 우리는 ‘소레바논’이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패전하자 1920시리아의 일부로 이곳을 식민 지배한 프랑스는 원래의 레바논 영역(소레바논)을 넘어대레바논이라고 불리는, 원래의 시리아 영역으로 여겨진 베커 고원, 레바논 북부와 트리폴리, 레바논 남부를 포함하여 1926년 시리아에서 분리시켜 1944 1월 독립할 때까지 위임통치 아래 자치국으로 만들었다.

대레바논이 되면서 가장 큰 변화 중에 하나가 이슬람 교도들의 대규모 유입이었다. 즉 당시 레바논 안의 기독교도의 비율은 85%에서 54%로 감소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레바논의 독립운동을 레바논 내 종교적 갈등을 이용해 저해하려는 의도이었고, 실제로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원래부터 레바논이었던 지역에서 많이 살던 마론파 교인들은 소 레바논주의를 주장한 반면에 타 기독교 종파와 드루즈파,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계열은 아랍 민족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대 레바논주의를 주장했다.

 

독립 뒤 레바논은 복잡한 종파(宗派)의 대립을 배경으로 독특한 종교연합국가를 형성하였다. 1943년 국민협정 (National Pact)으로 다수의 마론파 기독교도가 대통령직을 차지하고 수니파와 시아파 등의 종파들이 각각 국무총리와 국회의장 등의 각료를 나누어 가지는 식으로 권력이 배분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중립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철저한 자유화 정책을 추진하여 아랍 여러 나라의 물자와 정보 제공의 중간자적 역할로 독자적인 번영을 유지했다. 이 같은 정부 구성으로 레바논은 ‘모자이크 국가’, ‘조각 국가’라는 별명을 달았다.

 

레바논은 중동 지역에서 가장 근대화된 국가가 되었고, 베이루트는 중동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문화적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레바논이 인종, 종교적 취약점을 가진 국가임에도 중동의 사회,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외부요인에 의한 것이 컸다. 레바논은 1950년대와 60년대 주변의 아랍 국가들이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혼란이 반복될 때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 경제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주변 아랍국가의 자본과 고급인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특히 주변 아랍국가의 빈약한 서비스산업은 레바논의 급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비교적 다른 중동 국가에 비해 정치, 종교적인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레바논은 교육, 의료, 금융, 관광과 같은 서비스산업을 통해 국제적인 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각 국가’로서의 파열음은 1958년 카밀 샤문(Camille Chamoun, 1900-1987) 대통령이 친서방 노선을 걷는 것에 이슬람 세력이 반발하면서 터져 나왔다. 기독교계의 샤문 대통령은 레바논의 이슬람인들이 아랍민족주의 운동에 고취돼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과 가까워지려고 하자 불안해했고 따라서 그는 레바논 기독교계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서방에 접근했다.

이에 이슬람 세력은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1958 5월 전국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샤문 대통령을 비판했다. 샤문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결국 유혈충돌이 빚어졌다. 갈등이 길어지면서 레바논은 정부 지지파와 반대파로 찢어졌고, 급기야 시가전으로 확대됐다.


 

Camille Nemr Chamoun, second president of Lebanon (1952. 9. 1958. 9.).

 

 

미국은 샤문 정권이 흔들리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친서방 정권인 레바논은 미국에 대()중동 외교를 펼치는 데 유용한 거점이었다. 미국은 영국, 터키와 함께 약 15000명의 병력을 베이루트에 상륙시켰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화를 돋웠다. 레바논 주위의 아랍국가들은 미국이 레바논의 내정에 개입한다며 비난의 화살을 던졌다. 당시 아랍연맹에 가입하고 있던 10개 국가는 유엔에 ‘중동평화결의안’을 제출하고 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레바논은 3개월간 전쟁터로 변했고, 이 과정에서 미군을 포함해 3000여명이 사망했다. 피해가 커지자 레바논 기독교계와 이슬람교계는 타협을 했고, 미국은 1958 10월 레바논에서 병력을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한편 레바논은 1948 이스라엘 건국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난 중동전쟁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1970 9월 요르단 내 정정 불안 요소인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제거하고자 압박했는데, 이들이 레바논으로 도피하면서 레바논은 또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하였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는 레바논 공권력이 약해진 점을 이용해 레바논을 거점으로 삼아 대()이스라엘 무장활동을 벌였다.

 

이후 레바논에서의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의 수가 거의 비슷하게 되어 마론파 기독교인들의 우위는 무너졌으며, 그 뒤 정세불안은 더욱 심해졌다.

이슬람교도는 총리의 권한 강화 등 보다 강력한 권한을 요구하였고 이에 마론파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 반대하는 팔랑게(Phalange) 민병대를 결성하여 이슬람에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팔랑게 민병대를 지원하였다.

 

1975 2월 레바논 남부의 한 항구에서 기독교계 회사가 독점 어업권을 획득하자 이에 반발한 이슬람교도 어민들이 군대와 충돌, 20여명이 사망한 것이 내전 재발의 시작이었고, 1975 4 13 PLO가 베이루트의 한 교회당을 기습하여 다수의 기독교도들을 살해하였고, 이에 대해 기독교도들로 구성된 팔랑게 민병대가 즉각 보복공격을 감행하는 것으로 레바논은 내전의 아수라장으로 빠져든다. 특히 레바논에 거주하는 마론파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시가전이 있은 1975 9 7일부터 더욱 격화되어 본격적인 내전상태로 돌입했다.

 

레바논 내전은 1975년 시작한 이래 몇 차례의 휴전을 제외하고는 대외세력-시리아, 이스라엘, 이란, 유엔과 서방국가-이 개입하면서 지속되었다. 레바논 내전은 레바논 내의 파벌 갈등에 외부세력이 개입하면서 아랍과 이스라엘의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내전이 지속되자 시리아는 사태 수습을 명분으로 1976 11월 레바논을 침공하였고, 이런 시리아의 군사개입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내전에 간섭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시리아는 레바논의 베카 계곡에 주둔하면서 아말민병대를 조종하여 레바논 내전에 깊이 개입하였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텔아비브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1978 3월 레바논 남부를 침입하여 3개월 간 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를 이유로 레바논 영내에 수시로 군대를 진입시켰다. 이스라엘의 이런 도발은 아랍을 자극시킬 우려가 있어 유엔은 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6천 여 명의 유엔 평화군을 레바논 남부에 파견하여 주둔시켰다.

 

1982년 이스라엘은 레바논 남부에 거점을 형성한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전면 침공을 단행하였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시리아군이 베카 계곡에 미사일 및 중화기를 배치하여 이스라엘의 안보에 위협을 가하자 이를 제거할 의도도 있었다. 즉 이스라엘은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 위해 레바논을 전면 침공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거점인 베이루트를 무차별 폭격하여 2천 여 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사망하였다. 이에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적인 압력이 거세지자 이스라엘은 레바논에서 철수하였지만 레바논 남부의 리타니강 이남 지역의 점령은 계속하였다.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지속적으로 점유하면서 마론파가 중심이 된 남부레바논 기독교 무장 세력을 보호하여 자국과의 완충지대를 설정하려는 의도였다.

 

레바논 내전은 1990년 타이프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기간 동안 총 13만에서 25만의 사망자와 100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앙상한 건물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