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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 폐위

산풀내음 2016. 8. 19. 22:07

19749 12,

에티오피아 군정, 셀라시에 황제 폐위

 

에티오피아를 44년 간 통치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던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1892-1975) 황제가 1974 9 12일 초라한 폭스바겐을 타고 궁궐로부터 쫓겨났다. 이로써 그의 통치는 끝이 났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1892년 황제 메넬리크 2세의 사촌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시 이름은 타파리 마콘넨(Tafari Makonnen)이었다. 19살 때 메넬리크 2세의 외증손녀와 결혼한 뒤 1916년 메넬리크 2세의 외손자인 이야수 5세 황제를 쿠데타로 내쫓았다. 쿠데타의 명분은 이야수 5세가 이슬람교 우대 정책을 편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를 배신했다는 명분인 것이었다.

 

자우디투 1를 황제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행사했다. 1930에 선제가 서거하자, 곧바로 황제가 되었고, 이름도 '거룩한 삼위일체의 힘'이라는 뜻의 하일레 셀라시에로 바꾸었다.

셀라시에는 우선 황제 대관식 자체를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상징적 교회인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성대하게 열었다. 그리고 성서예언을 수행하는 의식을 치름으로써 자신을 세속적인 황제와 종교적 교황의 이미지를 중첩시키면서 신격화했다.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군홧발을 피해 황제는 19365월 외국으로 망명하였고, 6 30일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영국의 도움을 얻어내어 수단에서 에디오피아 망명군을 조직하고 영국군과 함께 1941 1월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공격했고 몇 개월 뒤 되찾았다.

 

그는 왕위에 복귀했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1951년 한국전에도 참전했다. 그리고 그는 개인적인 권위에 의존하는 권력을 행사했으며 1955년에는 전보다 더 많은 권력을 그에게 부여하는 새 헌법을 승인했다.

 

집권 말년에 접어들면서 실업 문제와 기근 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주로 북동부 지역에서 발생한 기근으로 인해 1974년 한 해 기아로 10만 명이 사망할 정도였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소수의 귀족과 고위관료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해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70% 이상은 가난한 소작농의 신세였다. 또한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대지주로 가난한 농민들에게 무거운 소작료를 징수함으로써 사회적 모순을 가중시켰다.

 

또한 40%가 넘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있어서 하일레 셀라시의 친기독교적 정치는 국민적 통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가운데 제정(帝政)에 반대하는 세력이 증가하였고 1974년 육군 소령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일으킨 쿠데타로 폐위되었고, 그 다음해 갑자기 사망하였다. 공식 발표는 수술 후유증이었으나 제정 지지파들은 멩기스투가 암살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황제의 유골이 멩기스투 정권이 붕괴된 후인 1992년에야 궁전 내부에서 발견되었고, 심지어는 화장실 바닥에 가매장되어 있다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으로 봐선 암살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나마 셀라시에 황제의 유해는 2000년에 아디스아바바 대성당에 안치되면서 겨우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1968년 방한한 하일레 셀라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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