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23일

9월 총파업

산풀내음 2016. 8. 25. 23:16

19469 239월 총파업

 

1946 5월에 조선공산당의 당원인 은행 직원이 이관술의 지휘하에 10만 원의 위조지폐를 만들다가 야간순찰 중이던 군정청 수도경찰에 의해 적발된 조선정판사 위폐(僞幣)사건을 계기로 남한의 공산주의 운동 세력과 미군정의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정판사는 우파 노선을 걷던 천주교회에 불하되었고, 해방일보는 폐간 당하였고 조선공산당은 당사를 압수 수색 당한 뒤 입주해 있던 건물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나아가 미군정은 1946 9월 6,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좌파에 우호적이던 3진보신문을 강제로 폐쇄하고 10여명의 신문사 간부들을 체포했다. 여기에 미군정 군정 경찰은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조선공산당 최고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발령했다.

 

조선공산당은 보다 과격한 대중적인 투쟁을 선동하였고 총파업을 계획한다. 파업의 주도 세력은 전평(全評, 전국노동조합전국평의회)으로 10월로 예정된 총파업을 갑자기 9월로 앞당겼다. 미군정 운수부가 적자 타개를 내세워 운수부 종업원을 25%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꾼다는 발표가 있고 난 뒤였다. 철도 노동자들의 불만에 편승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해방이 된지 1년이 지났지만 미군정 아래에서 민중의 처지는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어려워졌다. 1946년의 물가는 1944년에 비해 92배가 뛰었다. 1945 5월의 물가지수 233일 때 노동자 임금지수 233이던 것이 1946 5월에는 물가지수가 77,393으로 오른데 비해 임금지수는 6,015였다. 임금은 물가에 비해 13분의 1밖에 안 올랐다.

1946 1월에 쌀 한 말에 180원하던 것이 9월에는 1,200원으로 올랐다. 농민들은 일제 식민지시기에도 없던 하곡(보리쌀)공출까지 강요당하자 불만이 높아졌다. 9월 철도파업이 시작되기 전 서울시내에서 벌어진 24건의 파업에 노동자 3천 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농민들은 7월부터 하곡(보리쌀)수집반대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916, 철도 노동자들이 미군정에 6개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시한부 파업을 통보했지만 미군정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923일 부산 철도 공장 종업원 약 7000명의 파업을 개시로, 9 24 9시에는 운수 동맥의 심장인 경성 철도 공장의 종업원이 운수부장과 철도국장과의 직접 면회를 조건으로 파업에 돌입하면서 전국적으로 파업이 확대되었다. 광복 후 최초의 그리고 한국노동운동사상 최대규모의 ‘9월 총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요구 사항 6개항은 (1) 쌀 배급(노동자는 4合 가족은 3), (2) 일급제 반대, (3)임금 인상, (4) 해고 감원 반대, (5) 급식을 종전과 같이 계속할 것, (6)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할 것이었다.

 

전평이 주도한 이 전국적 파업 운동은 7월 이후 공산당이 채택한 신전술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신전술이란 그 동안 미군정에 대한 직접 비난이나 항거를 삼가던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 저항에 나선 것이다.

 

전국에서 4만 명의 철도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해 수송망이 마비되고, 금속, 화학 등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15만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9월 27에는 서울의 중학교전문학교 학생 1 5천 명도 가세하여 학원의 자유,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은행, 병원, 미 군정청으로까지 동정파업이 확대되자, 930일 새벽2시 미군정은 총파업의 본산이었던 서울철도 파업단에 무장한 경관 2천여 명을 투입했다. 거기에 지금의 한국노총인 당시 대한노총, 대한민청, 이승만이 이끌던 독촉 등에 소속된 우파 청년단 1천여 명도 가세했다.

 

8시간에 걸친 시가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결국 승리는 첨단 무기로 무장한 경찰 측이었다. 좌익 간부 3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만 수백 명이 나왔다. 전체 연행자는 1,700여 명에 달했다. 파업 세력은 우파 세력에 점거됐다.

미군정과 반공 우파 청년단에 의해 파업은 무너졌다. 지방에서는 아직 산발적인 파업이 이어졌지만 파업은 전반적으로 끝물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은 갑자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0 1, 대구에서는 노동자들이 모여 파업 시위를 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경찰은 이들에게 발포를 했고, 사상자가 발생했다. 파업이 다시 시작됐다. 대구 10.1 사건의 시작이었다. 대구 10월 항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대구 폭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졌고 200만 명이 넘게 참가한 남한 최대의 민중 항쟁으로 발전됐다.


1945 11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창립대회 장면



9 30일 경찰의 진압작전



철도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1947년에도 일어났다. 사진은 1947년도 철도노동자 투쟁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