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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학생의 등교보호를 위해 미국 리틀 록 고등학교에 군부대 투입

산풀내음 2016. 8. 25. 23:29

19579 23,

흑인학생의 등교보호를 위해 미국 리틀 록 고등학교에 군부대 투입

 

1619년 아프리카 흑인들이 네덜란드 배를 타고 버지니아로 팔려온 이래 미국은 오랫동안 “유럽계 백인들에게만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였다. 1808년 노예 수입이 불법화되었지만 여전히 노예는 소유의 대상이었다. 1833년 영국이 먼저 노예제를 폐지했고 미국에서도 노예제 폐지 운동이 시작되었다.

 

 

1962 9 22일 링컨의 노예 해방 예비선언에 이어 1963 1 1일 역사적인 노예해방선언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남북전쟁이 끝난 뒤인 1865 1218일 “노예제는 미국 연방 및 미국 연방의 관할에 속하는 어떤 지역에서도 금지된다”는 내용의 수정헌법 13조가 의회를 통과함으로써 미국에서 노예제가 공식 폐지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종차별은 존재했고 1896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 (Plessy v. Ferguson, 163 U.S. 537, 1896)에서 대법원의분리하되 평등하다는 판결은 차별을구별이란 이름으로 포장할 수 있게 만들었다.

원고인 플레시는 7/8이 백인, 1/8은 흑인인 피부가 하얀 혼혈인이었다. 그는 백인 열차 칸에 탑승한 뒤 차장으로부터 유색인종 칸으로 옮겨 가라는 명령을 거부한다. 그는 인종 격리 차량법 위반으로 고발된다. 플레시는 대법원에 위헌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분리하되 평등하면 문제없다고 일축했다. 이 판결문은브라운 대 토피카재판이 있기까지 온갖 차별을 법적으로 보장했다.

 

 

 

1954 5 17,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Brown v. Board of Education of Topeka)의 미국 대법원 판결에서 '공립학교의 인종 차별은 위헌' 이라는 결정을 내려 플레시 대 퍼거슨 판례을 60년 만에 뒤집었다.

이 사건은 1951년 미국 캔자스 주 토피카에 살고 있던 여덟 살 초등학교 3학년 흑인소녀 린다 브라운이 가까운 백인학교를 놔두고 멀리 떨어진 흑인학교에 다니는 것에 불만을 느껴 린다의 아버지 올리브 브라운이 인근 섬너 초등학교에 전학을 신청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게 된다. 이에 분노한 올리브 브라운이 소송을 건 것이다.


  

이어 워런 대법원장은 빠른 시일 내에 남부에 존재하고 있던 불평등한 인종분리 교육을 통합하라고 주 정부에 명령했으나, 남부의 주에 속한 백인학교 3000여 개 가운데 오직 600여 개 만이 통합하는 모습을 보이며 대다수가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1957, 전미 유색인종 협회(NAACP)에서 우수한 성적과 태도를 기준으로 뽑은 아홉 명의 흑인 학생들은 리틀록 센트럴 하이스쿨(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에 입학을 신청한다. 브라운 부녀의 노력으로분리하되 평등하다는 판결은 힘을 잃었고,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 또한 대법원의 판결로 이들의 입학을 허가하려 했다.

 

그러나 리틀 록이 위치한 아칸소 주는 흑백 통합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주 중 하나였다. 리틀 록의 백인사회 또한 격렬하게 반발했다. 대법원의 분리 교육 통합정책을 비난하며 흑인 학생들의 백인학교 입학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들었다.

8 20일 아칸소 주 주지사 오발 포버스(Orval Faubus)는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모인 군중들에게 통합 정책을 비난하는 성명까지 발표하기 이르렀고, 개학이 가까워지자 그는 9 2 일 주 방위군 270명을 동원해 학교를 포위시켰다.

명목상으로는 흑인 학생들의 등교로 인한 시민들의 폭력적인 대응을 예방한다는 구실이었지만 사실상 이는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절대 허가 할 수 없다는 결의 표명이었다.


 

1957 8월 리틀록 시민들의 학교 통합 정책에 대한 반대 시위


8 20일 아카소 주 주지사 오발 포버스가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통합정책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

 

9 4, 9명의 흑인 학생들은 학교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군인들의 저지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돌아서는 그들의 주위로 수많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모욕적인 욕설과 위협을 가했다. 입학원서를 제출한 이들은 17명이었으나 이날의 충격으로 8명은 입학원서를 철회한다.


 

9 4, 등교를 저지 당하는 흑인 학생들


학교를 포위한 주방위군



리틀 록 나인 중 한명인 엘리자베스 엑포드와 야유와 협박을 하는 백인들

 

주지사의 강경한 태도에 교육위원회는 당황했고 연방 판사는 주지사에게 압력을 가했다. 주지사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9 10, 법무장관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주지사의 직무정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한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34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보수 중의 보수, 텍사스 출신인 그 또한브라운 판결을 불만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틀 록 사태가 커지자 아이젠하워 대통령 또한 주지사의 도 넘은 행위를 비판과 함께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주인공으로 익숙한 제101 공수사단 2,000명을 리틀 록 고등학교에 투입한다.


 

학교로 투입되는 101공수사단



인종차별자 시위 진압

 

마침내 1957 9 23일 미국 남부 아칸소주() 리틀 록의 센트롤고등학교에 9명의 용감한 흑인 학생들이 미국 연방 공수부대의 보호 아래 최초로 백인학교에 등교했다. 그러나 이들의 등교를 반대한 2000명의 백인 학생들 거의 모두가 등교를 거부했고, 결국 흑인의 입학을 반대하는 무리와 이를 수호하려는 무리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 사상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아칸소 주 방위군은 연방군에 편입시킴으로써 주지사에게서 군사력을 빼앗았고 공수부대원들과 주방위군 1만 명이 즉각적으로 사태의 통제에 들어갔다. 학교 주위에 진을 치고 있던 인종차별주의자 백인 시위대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924일 밤 미국 백악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미 전역에 흑인 학생의 백인학교 입학 허가를 호소했다. 취임이래 가장 간절한 연설이었다. 25, 350명의 공수부대가 감시하는 가운데 흑인 학생들이 드디어 등교하기 시작했다.

 

결국 리틀 록 나인은 백인들로부터의 온 갓 무시와 고난 속에서도 일년이란 시간의 학업을 마치며 그 해에 중앙고등학교에서는 최초의 흑인 졸업생이 탄생하는데 이는 어니스트 그린 (Ernest Green, 1941~)이었다.

졸업식 날 중앙고등학교의 교장은 어니스트에게 그가 다칠거라는 소문 때문에 졸업식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학교 졸업장을 우편으로 받으면 어떻겠느냐는 재안을 하지만 어니스트는 거절했다. 졸업 후, 어니스트는 미국의 미시간 주립 대학교 학사 학위와 대학원 학위를 받았다.


The Little Rock 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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