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24일

미국 연방수사국, 미 해군정보국 로버트 김을 기밀유출혐의로 체포

산풀내음 2016. 8. 27. 05:37

19969 24,

미국 연방수사국, 미 해군정보국 로버트 김을 기밀유출혐의로 체포

 

1996 9 24일 미 연방수사국(FBI)은 미해군정보국(ONI, Office of Naval Intelligence) 소속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 1940 1 21 ~ )을 체포, 최소한 50여건 이상의 비밀정보들을 한국 정부에 넘겨준 혐의로 기소했다. onI는 첩보 수집부대였던 미 해군 정보사령부(NIC, Naval Intelligence Command)의 후신으로 세계 각처에서 수집한 첩보를 취합, 분석하는 곳이다.

 

로버트 김은 전남 여수 출신으로 경기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뒤 24세 때 유학차 도미(渡美), 4년 후 미 항공우주국(NASA)에 취직했고 1974년 미국 시민권도 얻었다. 1978년 매릴랜드주 수틀랜드 소재 미 해군정보국에서 근무를 시작, 1년 후부터 극비로 분류된 서류를 취급하기 시작한 컴퓨터 전문가였다.

 

그가 주미 대사관 해군무관 백동일 대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511 28일 하와이에서 열린 안보관련 세미나였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1차 북핵위기로 미국이 북한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다소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북한의 이른바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이 먹힌 시기이기도 했다.

 

이날 행사를 마치고 백대령은 로버트 김에게제네바합의는 북핵 위협을 근본적으로 제거한 것이 아닙니다. 북핵으로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은 한국인데 미국은 제네바합의를 지키기 위해 한국의 불안을 나 몰라라 하고 있습니다. 첩보수집 능력에 한계가 있는 한국으로서는 북한군과 관련된 첩보를 제대로 입수하지 못하고 있으니 기밀이 아닌 사항은 김선생님께서 도와주십시오.” 라고 했고, 로버트 김은한국군의 대북첩보 수집 여건이 그렇게 열악하냐?” 고 놀라워하며도울 수 있는 한 도와주겠다고 대답했다.

이 만남 이후 로버트 김은 비밀로 지정되지 않은 것 중에서 한국군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는 자료가 있으면 우편으로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북한 주민과 북한군의 동요 여부, 국제사회가 보내준 식량이 북한군에게 유입되었는지의 여부, 휴전선 부근의 북한군 배치 실태, 북한이 해외로 수출하거나 수입하는 무기 현황 등 한국으로선 중요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기밀로 분류되지 않은 자료들조차 최대의 동맹국에 쉽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19969 24일 워싱턴 DC의 포트 마이어 미국 육군 장교클럽에서 우리 정부가 주최하는 국군의 날 행사가 열렸다. 백동일 대령은 이 자리에 로버트 김을 초청했고, 행사가 시작될 무렵 양복 차림의 낯선 젊은이 3명이 찾아와 백대령이 보는 앞에서 로버트 김을 국가기밀 유출혐의로 체포, 연행했다.

 

FBI로부터 로버트 김을 송치 받은 미국 연방검찰은 김씨를 간첩죄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이 사건은 곧 한미간 외교 마찰을 불러왔다. 한국 정부는 “김씨가 적국(敵國)이 아닌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에 정보를 제공했는데 왜 간첩죄에 해당하느냐”고 항의했으나 미국은 들어주지 않았다.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연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된 로버트 김은 배심원들이 유무죄를 평결하기 전에 자신이 미국 법을 어기고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는 ‘플리 바기닝(plea bargaining)’을 선택했다.

플리 바기닝은 피고인이 유죄를 인정하고 2심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에 검찰은 적은 형량을 구형하는 제도다.

 

그러나 미국 연방검찰은 로버트 김에게 군사기밀유출죄를 적용한 후 법정 최고형 10년을 구형하였다. 연방검사는 플리 바기닝을 했기 때문에 그나마 간첩죄로 기소하지 않았다며, 군사기밀유출죄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최고형을 구형한 것이었다.

1997 7 12일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 연방지방법원의 브링크마 판사는 로버트 김에게피고는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 맹세한 충성 서약을 배반했다, 징역 9년에 주거 및 활동을 제한하는 보호감찰 3년 형을 선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8 11 6조순승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외교통상부 국정감사에서 당시 장관 홍순영에게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촉구하자 홍순영은 "로버트 김이 미국 시민권자라서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고 답했고, 1999 11 9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개인의 문제로 우리와는 전혀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라고 답하는 등 조국을 위해 일하다가 억울하게 수감된 그를 한국 정부는 결국 외면했다.

 

로버트 김은 약 9년의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미국에서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잃었다. 그를 위한 활동을 한 것은 한국 정부가 아니라 후원회를 결성한 민간이었다.

 

백동일 대령은 면책특권을 가진 외교관 신분이어서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사건 직후 미국 정부는 그를 사실상의 ‘기피 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목해 귀국조치 되었고, 이후에도 계속된 미국의 압력으로 결국 제독(提督)의 꿈을 접고 2001 1월 대령으로 군복을 벗어야 했다.

대한민국 무관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했기에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백동일 대령은로버트 김의 행동은 모국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우방을 위한 일이 국익에 배치된다는 이유로 감옥생활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처사라며 가슴 아파했다.

 

로버트 김의 행위가 사심이 없다는 것은 정보를 제공하는 동안 단 한번도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적이 없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백동일 대령은로버트 김에게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고 싶었지만 번번히 거절했다면서한국군 관계자를 소개시켜주기 위해 골프모임과 저녁식사를 한 것이 내가 해준 전부라고 훗날 털어놓았다.

 

2004 6 1일 오전 9시 미국 버지니아주 애시번의 자택으로 로버트 김이 돌아왔다. 그러나 감옥에서 8년을 보낸 사람 같지 않게 표정은 온화하고 밝았다. 김씨는 이날부터 정식 출감 전 집에서 생활하는 가택연금(Home Confinement)에 들어갔다. 만기 출소는 7 27. 출소 뒤에도 3년 동안은 집 근처 일정 지역을 벗어날 수 없는 보호관찰을 받아야 했다.

 

한편, 6 4일 장남의 출소를 손꼽아 기다리다 20042월 별세한 부친 전 한국은행 부총재 김상영씨를 따라 어머니 황태남씨 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에 로버트 김은 미 법무부 감찰관에게 한국 방문을 요청했지만 감찰관은 전례에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로버트 김은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2005 103일 보호관찰을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된 로버트 김은 2005 11 6일 오후 540분쯤 드디어 고국 땅을 밟았다. 그는 못난 장남의 석방을 학수고대하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에게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고 싶다고 했다.

 

김씨는 입국성명을 통해그 동안 잃은 것도 많지만 더 많은 것을 얻었다면서, “초등학교 학생의 돼지 저금통부터 칠순 할머니의 후원금까지, 그리고 감옥소에서 받은 수많은 위문편지들이 지금까지 나를 지켜준 버팀목이 됐다고마움을 표시했다.

김씨는 이어저는 분명히 스파이도 아니었고 한국 정부가 고용한 사람도 아니었다고 밝힌 뒤, “하지만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고 했다. 그는 또자유의 몸이 된 이 순간 미국이나 한국 정부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자회견 중에는 간간이 자신의 구명에 소극적이었던 정부에 대해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씨는한국 정부에서 파견한 무관과 연관된 일이고 나라를 위한 일이었는데 정부가개인 간의 일로 축소하고 무시를 한 것은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510분쯤 김씨가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환영객들 사이에서~” 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김씨는 환영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다 백동일 예비역 대령을 발견하고 다가가 그를 힘차게 껴안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백동일) “이제 다 잊고 앞만 보고 갑시다”(로버트 김)…. 몇 마디 나누지 않아 백씨는 이내 김씨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울먹였다.

백씨는 “10년 만에 선생님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까, 몇 주 전부터 외우다시피 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감정이 차올라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고 했다.



앨런우드교도소에서 가족과 함께 한 로버트 김

로버트김 선생님과 포옹하는 백동일 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