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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 사망

산풀내음 2016. 8. 28. 02:14

19229 25,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 사망

 

신규식(申圭植, 1880 ~1922)은 충청도 문의군 동면 인차리(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그들 문중만을 별도로 '산동 신씨'라고 부를 만큼 오랫동안 고령 신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내려오는 곳이다. 신규식은 어려서부터 영민해 신채호, 신백우와 더불어 '산동삼재(山東三才)'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는 1896년경 서울로 올라가 관립한어학교를 다녔으며, 1900년에는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육군무관학교는 근대적 고급장교 양성학교로 입학 조건이 까다로워 지배층 관료 자제들이 아니면 입학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신규식이 무관학교에 입학했던 이유는 일찍부터 군사력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라가 기울고 있을 때 신규식은 관립한어학교와 육군무관학교에서 문·무를 쌓으며 국권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조국은 이미 바람 앞의 등잔불이었다. 그는 을미의병 당시 16세의 나이로 소년 의병단을 조직하기도 했었다. 1905년 을사조약 때는 의병을 일으켜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사흘을 굶다가 이내 음독자살을 기도 했다. 가족들에 의해 목숨은 구했지만 오른쪽 눈의 시신경에 이상이 생겨 애꾸가 됐다.

신규식은 “그래,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자”며 흘겨볼 예()자와 볼 관()자를 써서 ‘예관(睨觀)’을 자호로 삼았다.


그는 을사 이후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해보려고 학회를 조직하여 공업계 잡지도 발간하였으며, 계몽, 강연활동도 다녔고, 윤치호, 윤효정 등이 조직한 대한자강회 (大韓自强會)대한협회 (大韓協會) 등 애국계몽단체에도 가담하여 활동했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됐을 때 또 한번 자살을 기도했으나 이번에는 마침 그의 집을 방문한 대종교 종사 나철이 그를 구했다.

1911년 봄, 그는 상하이로 망명해 신정(申檉)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중국혁명에 뛰어들었다. 먼저 혁명가 쑹자오런(宋敎仁)이 주필을 맡은 민립보(民立報)의 사원 쉬티엔푸(徐天復)와 교유관계를 맺고 이를 계기로 신해혁명을 준비하던 '중국혁명동맹회'에도 가입했다. 그는 신해혁명의 주역인 쑹자오런, 황씽(黃興), 천치메이(陳其美)에게까지 친분을 넓히며 중국혁명동맹회 회원으로서 신해혁명에 당당하게 동참하였다. 중국 혁명의 성공이 조선의 해방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결국 이때의 연대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쑨원으로부터 승인 받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1919 4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거국적인 3·1운동 이후 국내외에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9 11일 이들을 통합하여 상하이에 통합 임시정부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통합 임시정부는 출범과 함께 독립운동의 노선대립으로 갈등과 분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노선은 '외교독립론'이었다. 그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고자 1차 대전의 종전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다. 그러나 독립 청원은 시도부터 좌절되었다. 파리강화회의는 철저하게 승전국들의 이익을 위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국제회의였을 뿐이었다.

 

임시정부의 외교독립노선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깊은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임시정부 내에서 이승만을 향한 불만이 갈수록 고조되자, 1920년 말 이승만이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계파간의 골만 더욱 깊어져 이동휘, 안창호 등이 임시정부에서 탈퇴했고, 1921년에는 이동녕마저도 임시정부를 떠났다.


 

1921 상하이에 도착한 이승만대통령 환영식 (오른쪽 두 번째 선글라스를 낀 이가 신규식, 세 번째는 안창호, 가운데는 대통령 이승만)

 

그러나 신규식은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을 끝까지 지지했다. 그는 망명 초부터 독립을 위해서는 국제적인 공조나 연대가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느꼈다. 또한, 국제적 연대의 구심점이 될 임시정부가 반드시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그 해 5월 전권을 신규식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신규식은 국무총리대리 겸 법무총장 겸 외무총장이면서 대통령직까지 대행하게 되었다.

 

한편 1921 10월 신규식이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광둥 호법정부를 방문하자 호법정부는 그를 공식적인 한국특사의 예로써 성대하게 맞이했다. 쑨원은 신규식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승인함은 물론, 여러 가지 원조까지 약속했다.

 

1922년에 열린 태평양회의가 별 성과 없이 끝나고 국민대표회운동이 다시 전개되자 신규식 내각은 외교 실패를 책임지고 총 사퇴하였다.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이 통과되고 임정이 곧 분란에 휩싸이자 신규식은 이를 통탄하며 25일간 불식(不食), 불언(不言), 불약(不藥)을 고집했다. 결국 신규식은 1922 925, 42세로 이승을 떠났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는 동생 신건식, 조카 신형호와 신순호, 사위 민필호, 외손녀 민영주의 독립운동까지 영향을 미쳤다. 부친 신용우의 의병활동을 포함하면 그의 집안은 4대에 걸쳐 민족운동을 이어간 민족혼의 본산이라 할 수 있다.




우로부터 신규식, 신석우,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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