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28일

장면 부통령 암살 미수사건

산풀내음 2016. 8. 28. 03:14

19569 28,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러닝메이트였던 이기붕은 민주당의 신익희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출마한 장면에게 패하여 부통령 자리는 장면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이미 노쇠한 상황이어서 이승만에게 변고가 생길 경우 부통령이 그 자리를 승계하게 되어 있기에 이기붕은 질투와 함께 두려움에 사로 잡힌다.



 

1956년 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 포스트

 

1956 8 15일 정·부통령 당선자 취임식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은 그를 노골적으로 견제하여 취임식장에 부통령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일반 귀빈들이 앉는 자리의 맨 가장자리에 앉게 했다.

여기에 더하여 취임사 발표 시간조차 주지 않아 장면은 간단한 성명서로 취임사를 대신하게 하였다. 나중에 자유당은 그의 성명서를 트집 잡아 장면 부통령에 대한 경고 결의안을 발의하기까지 했다.



1956 8 15일 광복절에 취임식을 갖는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장면. 이승만은 다른 참석자는 모두 소개하면서 정작 그날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장면은 소개하지 않았다.

앞에 있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살인마 두 가족, 왼쪽부터 이강석, 프란체스카, 이승만,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 1957 5월 경무대.

 

9 28일 민주당 전당대회가 있었다. 후일 장면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사전에 자신의 암살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당시 자유당 세력들이 장면을 암살하기 위해 두 가지 플랜을 짜두었는데 첫째는 장면이 전당대회장에 가기 위해 혜화동을 떠나 원남동 로터리 부근을 지날 때 장면의 차를 트럭과 충돌시켜 교통사고를 가장해 죽이는 것이었고, 둘째는 만약 교통사고 위장 암살플랜이 실패할 경우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전당대회장에서 장면을 저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암살의 위험이 있었지만 자신과 함께 고생한 당원들과 약속한 자리이었기에 참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면은 거짓으로 신변을 이유로 불참하겠다고 전당대회에 통고했고 전당대회가 열리는 시공관으로 이동할 때에도 코스를 바꾸어 장소에 도착했다. 여전히 전당대회에서의 암살의 위험은 상존하는 상태였다.

 

장면이 부통령에 취임한지 한 달여 만에 열린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은 대표 최고위원에 조병옥을 선출하고 그 외에 최고 위원으로 장면, 곽상훈, 박순천, 백남훈이 선출되었다. 장면이 연설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와 열화와 같이 갈채를 보내는 민주당원들을 뒤로하고 시공관 동문을 통해 나가려 할 때 총성이 울린다. 암살 시도였다.

 

천만 다행히도 장면은 손에 스친 정도의 부상만 입었고 범인은 현장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체포된다. 이때 장면은 의연하게 나는 이상이 없다며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의외로 사건 5분 만에 당시 치안국장이자 이승만의 똥개였던 김종원이 달려와 범인을 데리고 갔다. 김종원은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즐겨 사용했던 군인 출신의 치안국장. 여순 사건 때 일본도로 목을 치고 다녔고 미군이 그 잔인함에 치를 떨었으며 거창 양민 학살 은폐 주범이었다.


 

오른손 관통 직후, 경호원의 부축을 받은 장면

 

범인은 김상붕이라는 사람이었다. 그의 인척이 민주당 구파였고 그는 끌려가면서 난데없는조병옥 만세를 외쳤다. 조병옥은 민주당 구파, 장면은 신파였으니 언뜻 보기에 장면에 불만을 품은 민주당 구파가 신파를 공격한 듯 보이게 한 서툰 연출이었다. 하지만 그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별로 없었다.

 

장면은 간단한 응급처치 후 귀가했는데 부통령 경쟁자였던 이기붕이 위문 차 찾아오자무슨 정치를 이렇게 하시오?”라고 힐난했고 이기붕은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라고 총총 돌아갔다고 한다.

 

치안국은 조병옥 만세를 부르짖은 대로 김상붕이 민주당 신구파의 내분에 분노하고 장면이 친일행위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분노하여 총을 쏜 단독범행이라고 발표했지만 말도 안 된다는 항의에 부딪쳤고 수사를 진행한 끝에 최훈이라는 이를 그 배후라고 발표했다.

 

김상붕의 형 김상봉이 동생을 취직시켜 주는 등 뒤를 봐 주던 이가 최훈이었다고 제보한 것이다. 그런데 이 최훈이 쪽지로단독 범행했다고 해라.”는 전갈을 보냈다가 발각되어 꼼짝없이 얽히게 되자 성동경찰서 사찰주임 이덕신의 지시를 받아 한 것이라고 폭로한다. 일개 경찰서 사찰주임과 이런 일을 단독으로 꾸몄다는 걸 믿을 사람은 없었다.

 

공판 과정에서 최훈은 이덕신의 배후에 아마도 치안국장 김종원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 의혹이 김종원에게로 쏠리자, 김종원은 의혹을 극구 부인했다. 국회차원의 진상조사단이 김종원의 심복인 장영복 치안국 특수정보과장등이 개입되어 있음을 밝혀냈지만 민주당의 진상규명 촉구에 자유당 "국민을 선동하지 말라"며 맞섰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것은 19604.19 혁명이후였다. 김종원은 법정에서 “장면박사 저격사건은 전 서울시장 임흥순이 지시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사건의 배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즉 사건 40일 전 자유당 2인자인 이기붕이 당시 자유당 국회의원 임흥순(1959년에 서울시장이 되었다)에게, 임흥순은 내무장관 이익흥에게, 이익흥는 김종원에게, 김종원은 장역복에게, 장영복은 박사일 중앙사찰분실장에게, 박사일은 오충환 시경사찰과장에게, 오충환는 이덕신에게, 이덕신은 최훈에게 그리고 최훈은 김상봉에게 범행을 차례로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내무장관 이익흥은 일제 때 평북 박천 경찰서장을 한 골수 친일파 출신으로 이승만이 방귀를 뀌면 옆에서 “(이승만 대통령)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란 ‘아부 발언’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사건 관계자로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최훈, 김상붕, 이덕신은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에 의해 무기로 감형된 반면, 임흥순, 이익흥 등 배후조종 혐의자들은 모두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5·16 이후 이들 배후조종자도 전원 특사로 풀려났다김종원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61 12월 당뇨병으로 병보석을 받았고 1964 1 30일 죽었다.


 

장면 저격 사견에 대한 공판


재판 중인 임흥순 전 서울시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