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29일

문공부, 사상계 폐간

산풀내음 2016. 8. 28. 03:28

19709 29,

문공부, 사상계 폐간

 

1950~196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는 비판적 지성지였던 ‘사상계’는 1952년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 (원장 백낙준)의 기관지 ‘사상’에서 출발했다. ‘사상’의 편집인으로 참여했던 장준하가 1953 4월 이 잡지를 인수해 제호를 ‘사상계’로 바꾸고 월간 종합교양지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장준하가 1967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발행인이 부완혁으로 바뀌었다.



장준하 선생

 

 

창간호부터 당국으로부터 폐간 처분을 받기까지 통권 205호를 발행한 사상계는 민주주의와 자유언론, 남북통일, 노동 등의 분야에서 자유와 진보에 기반을 둔 권위 있는 글을 실었다. 특히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글로 진보적 지식인과 대학생들의 인기를 모은다. “사상계를 끼고 다니지 않으면 대학생이 아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창간기의 판매부수는 3,000부 정도였지만 195512월호로 1만부를 돌파하고, 1960년대를 전후해서는 당시로는 경이적인 5~8만부의 전성기를 누린다.

 

사상계의 최초의 필화 사건은 19588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6·25가 주는 역사적 교훈때문이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다음의 내용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해방이 됐다고 하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이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이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인 것이다. 일본시대에는 종살이라도 부모 형제가 한 집에 살 수 있고 동포가 서로 교통할 수는 있지 않았는가? 지금은 그것도 못해 부모처지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그 꼭두각시의 놀음이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아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 밖에는 될 것이 없지 않는가.

 

6.25전쟁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승만과 소련, 중공을 배경으로 한 김일성의 싸움이었지 민중이 한 싸움은 아니다. 그러니까 서울을 빼앗겼을 때 저 임진왜란 때 선조가 그랬듯이 이승만도 국민을 다 버리고 민중 잡아먹고 토실토실 살이 찐 강아지 같은 벼슬아치들과 여우 같은 비서 나부랭이들만 끌고 야밤에 한강을 건너 도망을 간 것이다.

 

밤이 깊도록 서울은 절대 아니 버린다고 공포하고 슬쩍 도망을 쳤으니 국민이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다. 저희끼리만 살겠다고 도망을 한 것이지 정부가 피난 간 건 아니다.


 

함석헌 선생

 

1958년 서울시경은 함석헌을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구속했고 구속 10일 후인 8 18일 서울지검에 구속 송치했으나 서울지검은 9 30일 조사결과 국가보안법위반혐의가 없다고 불기소 처분했다.

 

장면 정권의 혼란에 실망한 사상계는 516쿠데타에 대하여 초기에는 비교적 우호적이었지만 결국은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1964년 무렵, ‘박정희 대통령에게 부치는 공개장’이라는 기고문으로 필화를 겪고, 정권 차원에서의 압박으로 인한 광고 취소, 판매량 감소 등이 겹치면서 사상계는 심각한 재정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마침내 1970 5월호에는 폐간의 결정적 원인이 된 김지하의 오적이라는 시가 실리게 된다. ‘오적’은 부정부패로 물든 한국 권력층의 실상을 을사늑약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등 오적에 비유해 적나라하게 풍자했다. 시가 언급한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이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김지하 선생

 

1969년부터 이어진 3선 개헌 날치기, 정인숙 여인 의문사 사건, 와우아파트 붕괴로 흉흉한 민심에 맞닥뜨린 정부 당국은 사상계 수거에 나섰지만, 그해 6월 제1 야당인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김지하의 시가 실리자 방향을 바꿨다.

 

6 2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시를 쓴 김지하와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이 구속됐고, 잡지 발행은 사실상 중단됐으며, 929일 문화공보부가 등록 시의 인쇄인과 실제적인 인쇄인이 다르다는 것을 이유로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제39항과 제43항 및 부칙 3항 등을 적용시켜 사상계의 등록을 취소하면서 폐간되었다..

 

부완혁은 1972 4월 대법원에서 ‘사상계’ 등록취소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잡지사를 유지할 자금이 부족했고, 필자나 인쇄소도 찾기 어려웠다. 부완혁이 사망한 뒤 판권을 상속한 장녀가 몇 차례 복간을 시도하다 28년 만인 1998 6월호(206)가 발간되고, 2000 6월에는 207호가 나왔다.

그러나 이는 2년 이상 발행이 중단되면 등록이 취소된다는 정기간행물법 규정을 피하기 위해 임시로 한정본만 낸 것이다.

2003년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씨가 귀국해 복간을 재추진, 2005 10월부터 인터넷상에 웹진 형태의 ‘e-사상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