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

산풀내음 2016. 9. 5. 22:34

1895 10 8,

명성황후, 일본에 의해 시해(을미사변)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개입해 온 일본이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확장을 꾀하자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하며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에 맞섰다. 조선정부도 친일계를 축출하고 친러파를 기용하는 등 3국에 호응했다. 조선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줄어든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세력을 다시 만회하려 했으나, 명성황후 등 민씨 세력의 친러 정책 고집으로 난관에 부딪혔다.

 

1894 10 25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백작이 주조선 일본공사를 자청하여 부임한다. 일본정계의 거물 실세인 이노우에는 강화도조약 체결 때부터 간여한 자다. 그는 조선에 대한 일체의 전권을 일본정부로부터 부여 받고 부임한 것이다.

이노우에는 조선 강점을 위하여 우선 조선 군대를 일본화, 친일화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리하여 1895년 일제의 강제적 건의에 의해 조선 훈련대가 만들어진다. 조선군사를 일제의 지휘 아래 둠으로써 군사력을 장악하고, 그들의 목적에 따라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노우에는 내정간섭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견제와 박영효를 비롯한 대신들의 반발에 부딪혀 식민지화 기도가 차질을 빚자 이노우에는 휴가를 빙자하여 1895 6월 일본으로 일시 귀국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이노우에는 외교 경험이 전혀 없는 무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자작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고, 내각회의에서 대조선 300만 엔 기증금 제공을 제의하였다.

 

1895 7월 서울로 다시 돌아온 이노우에는 미처 확정되지 않은 300만 엔 기증금 제공 건을 확언하며 고종과 황후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미우라가 부임(서울도착 9 1)한 후에도 17일간 일본공사관에 머물렀다. 이 기간에 이노우에는 작전명여우사냥을 입안하여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범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도적 위치에 있지도 않았던 행동대 대장 무장 미우라를 배후 조정하여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종범으로 만들고 그는 9 21일 일본으로 떠났다.

마침내 일본공사관 밀실에서는 미우라,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공사관 서기), 오카모토 류스노케(岡本柳之助, 공사관부무관 겸 조선군부고문), 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 포병중좌) 등이 황후 시해에 관한 구체안을 확정하였다.

 

위해의 위기감을 느낀 명성황후는 경복궁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건청궁(乾淸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또 궁궐에 외국인이 있으면 그들의 눈을 의식해 일제가 함부로 위협을 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경복궁내에 서양식 건물을 짓고 외국인들이 머물게 했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거처했던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일 세력인 훈련대를 해산 시키고자 했다. 마침내 시해사건 하루 전 10 7일 새벽 2시 훈련대 해산 명령이 떨어진다. 이후 군부 대신 안경수 9시경 급히 이 사실을 미우라에게 통보하고, 뒤이어 우범선도 달려와 미우라에게 보고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미우라 공사는 작전명 '여우사냥'을 이틀 앞당겨 시행하게 된 것이다.

 

1895 10 8(음력 8 20) 새벽 5시경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최초의 총성이 울린다. 이것이 신호탄이었다. 일본의 군인. 외교관. 언론인. 거류민 등 살기 등등한 낭인들로 구성된 암살단을 앞세운 일본 군대는 궁궐의 추성문(秋成門, 북서문), 춘생문(春生門, 북동문)으로 두 갈래로 나뉘어 공격한다.


 

왼쪽 아래 사진은 명성황후 국장 장면.

오른 쪽 그림은 을미사변 발생 2개월여 뒤에 우치다 사다쓰치 일본 영사가 작성한 왕비 살해 현장도, 광화문으로 들어가 건청궁까지 이르는 침임경로와 시해의 주요 현장이 표시돼 있다.

 

한편 고종은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했다는 급보를 받고 이범진에게 시간을 다투어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에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이범진은 일본인 순찰을 피해 높이가 4~5미터인 담에서 뛰어내려 궁궐을 탈출하였다. 미국 공사관에 도착했을 때 대궐 쪽에서 첫 총성이 들려왔다고 이범진은 증언했다. 이범진은 미국공사관을 거쳐서 러시아공사관을 찾아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었음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궁궐 전방과 후방에서 예상치 못한 일제의 습격을 받자 궁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비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약15분 만에 일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총성이 울린 시각으로부터 마무리되는 시간까지 불과 사십 오분 정도였다고 한다. 수비대가 순식간에 무너진 데에는 앞서 기록했듯이 일본식 훈련은 받고 일제와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던 세력이었다.

 

궁궐문을 뚫고 들어온 일본군대가 찾은 곳은 건청궁이었다. 건청궁의 서편에는 고종의 침전인 장안당이, 황후의 침전인 옥호루는 그 동쪽에 있었다. 곧 이어 40~50명의 일본인 패거리들이 곤령합(坤寧閣)을 에워싸고 황후 수색에 혈안이 되었다.

 

당시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A.J.Scredin Sabatine)의 증언에 따르면 시해범들은 황후 찾기에 만 혈안이 돼 있었고 총칼로 무장한 비열한 사무라이들이 황후를 찾아 왕의 침전에 쳐들어 온 것을 고종이 꾸짖자 이들은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폭행을 하여 주저앉혀 고종의 어의(御衣)를 찢었다. 또 태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쳤다.

 

명성황우의 시해 당시의 상황과 관련하여 상궁의 말에 따르면 "왜인들이 황후와 궁녀들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다. (중략) 일본군은 궁녀들을 밀치며 황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입을 모아 여기에 황후는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왜인들은 (옥호루) 아래로 궁녀들을 집어 던졌다. 이때 황후가 복도로 도망쳤고, 한 왜인이 왕비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황후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가슴을 발로 세 번 짓밟았다. 그리고는 칼로 가슴을 내리 찔렀다."라고 했다.

 


 

특히 어처구니 없는 것은 '에조(英臟) 보고서'의 내용으로 능욕 장면을 묘사한 대목을 직접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에조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일본 낭인 중 한 명이 작성해 일본 본국으로 비밀리에 보낸 보고서인데, 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한 일본인 역사학자에 의해 최초로 공개되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 일이다. 또한 노할()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이시즈카 에조(Ishizuka Ehjo)의 보고서

 

이와 관련하여 일본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는1966년 보고서 전문을 소개하지 않은 채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 소개한 뒤 '사체를 능욕했다'고 해석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시간(屍姦)보다는 윤간(輪姦)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떠나 한 주권국가의 국모에 대하여 시해도 모자라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것은 인간임을 포기한 행위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일본의 잔인 무도한 행동은 국제적으로도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의 배일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여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의 계기가 되었다.


 

을미사변을 일으킨 낭인들(한성신보 사옥 앞에서)


명성황후 국장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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