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9일

신금단 부녀 상봉

산풀내음 2016. 9. 6. 22:01

196410 9,

신금단 부녀 상봉

 

1964 109일 오후 455, 일본 도쿄의 조선회관.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불렀다. “, 금단아.” 딸은 울음을 머금으며아바이그렇게 불렀다. 얼싸안았다. 14년 만이며 분단 이후 첫 이산가족 만남이었다.

남북한 당국 차원에서 추진, 성사된 상봉은 1985 920~23일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교환사업이 처음이었다. 남북은 1971년부터 시작된 적십자회담 테이블에 이산가족 상봉문제를 지속적으로 올렸지만 1985년에서야 첫 상봉행사가 성사됐던 것이다

 

1951 1월 눈 내리던 함경남도 이원에서 아버지 신문준이 1.4후퇴 당시 단신으로 월남했을 때, 딸은 12살이었다. 금단은 이후 운동에만 매달렸고 매일 오전 4시 반에 일어나 30리씩 달리고 20kg짜리 바벨을 300번씩 들어올렸다.

신금단은 1962년과 1963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즈나멘스키 형제상(兄弟賞) 쟁탈 국제육상경기대회에서 400m 800m에서 각각 1위를 차지했고, 이어 1963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1회 가네포 대회(신생국 경기대회)에서 400m 800m에서 두 개의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수립하고 200m를 포함 3관왕에 올랐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은 떼어 놓은 당상인 듯 보였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신생국 경기대회’를 유사대회로 규정하고 이 대회 참가 선수들의 도쿄 올림픽 출전 자격 박탈을 결정했고 북한 선수단은 이에 반발해 철수를 선언했다. 쓰린 마음을 안고 짐을 꾸리는 신금단에게 귀를 의심할 만한 얘기가 들려왔다.

“동무, 서울에서 아바이가 왔으니 따라오시오. 

 

신금단의 활약이 남한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안 신문준(당시 49)대한올림픽위원회를 찾아가 신금단이 자기 딸임을 호소했고 남북이 합의하여 도쿄 올림픽이 끝난 후 귀국하기 전에 만나기로 했으나 북한 선수단의 도쿄 올림픽 철수 결정으로 어려워지게 되었고 철수 전에라도 만나자는 이야기로 진행되었으나 이마저도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대한 각 측의 입장 차이로 계속 미루어졌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합의가 되어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지만 1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만 허락될 수 있었다.

 

북한 선수단이 일본을 떠나기 위해 니가타행 열차를 타기 직전 부녀는 만날 수 있었다. 딸은어머니와 동생들은 다 잘 있어요그렇게 말했고, 아버지는그래, 나도 서울에서 잘살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와 딸은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좋아요….” 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아버지의 옷깃을 쓰다듬었고, 아버지 역시 딸의 두 손을 꼭 쥐고 허공만 쳐다보았다.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 신금단 부녀

 

기차 시간이 되었다고 재촉하는 사람들에 떠밀려 딸은 차에 올랐고, 아버지는 넋을 잃은 듯금단아딸의 이름을 부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차에 오른 딸은 울부짖었고, “아바이 잘 가오그 한마디를 남기고 멀어져 갔다.

아버지는 니가타행 열차가 떠나는 우에노역으로 달려갔다.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다행히 초조히 역장실에서 기다리던 딸을 다시 한 번 안아볼 수 있었다. 기차는 떠났다. 그것이 이생에서 아버지와 딸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후 남한에서는 만남의 마지막에 신금단이 외쳤다는 "아바이!"라는 말에 영감을 얻어 1964년 만들어진눈물의 신금단 (노래 : 황금심)’이라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아버지 신문준은 1983 1227 6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눈물의 신금단,

https://www.youtube.com/watch?v=YF6RxaXy6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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