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9일

혁명가 체 게바라 처형

산풀내음 2016. 9. 6. 22:13

196710 9,

혁명가 체 게바라 처형

 


체 게바라(Che Guevara)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1928 6 14 ~ 1967 10월 9)1928 6 14,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안은 아니었고 자유주의적 좌파에 속하는 무신론자들이었다.


평생 동안 체 게바라를 괴롭힌 천식은 그의 나이 두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천식을 앓자 그의 가족은 아들의 건강을 위해 코르도바(근처의 알타그라시아)로 이사를 했고, 아들의 건강을 위해 그의 아버지는 에르네스토에게 여러 가지 운동을 가르쳤다.

 

청년 게바라는 종종 고독을 즐기며 미친 듯이 책을 읽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그리고 모험을 즐기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나이 17세 무렵 모터를 붙인 자전거를 이용해 아르헨티나 중부 지방을 여행하는 등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의학부에 입학한다. 자신의 지병인 천식으로 인해 그의 관심이 의학에 쏠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는 기회만 있으면 여행을 떠났다. 1952년에는 같은 의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스(알베르토는 그보다 나이도 많고, 체 게바라에게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해준 인물이다) 10개월여 동안 모터사이클을 이용해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한다.


그는 이때 갖은 고생을 하며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비참한 삶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특히 상파울루 나환자촌에서의 노동을 통해 "인간의 사랑과 유대감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를 떠나 잠시 미국의 마이애미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는 이때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관계 속에 그 실상을 깨닫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는 귀국한 후, 의학공부에 몰입하여 1953 3,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게바라는 라틴 아메리카 여행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이 처한 현실과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 미래가 보장된 의사에서 급진적인 혁명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의사가 된지 두 달 만에 게바라는 의사 가운을 벗어 던지고 아르헨티나를 떠나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 볼리비아로 갔다. 당시 라틴 아메리카는 서서히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1954년 중남미의 과테말라의 선거에서 자유주의적 좌파인 하코보 아르벤즈가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당시 과테말라의 경작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미국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츠의 경작지를 국유화시킨 후 이를 인디오와 빈농에게 재분배하는 개혁을 실시하고자 했지만 미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하게 된다미국은 직접적인 무력 침공보다는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해줄 우파 인물인 호세 카스티요 아마스를 통해 과테말라 내에서 군부 쿠데타를 획책한다. 이와 함께 기존 정부에 대한 악의적 유언비어와 소문을 퍼트린다결국 과테말라의 아르벤즈 정권은 무너지고 만다. 아르벤즈는 미처 피신할 틈도 없었고, 게바라는 이때 처음 무기를 들고 저항을 시도했으나 그들의 저항은 애초부터 상대도 되지 못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게바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학습을 시작했다. 미국의 과테말라 침공을 통해 게바라는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와 민중의 삶을 착취하는 현장을 목격했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와 세계 민중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체 게바라는 그곳 친구인 엘 파토호와 함께 멕시코로 갔고, 그는 이곳에서 에르네스코 게바라 데 라 세르나에서 체 게바라가 되었다. 이때가 1954 9 21일이었다. 그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준 사람들은 1953년 쿠바의 몬타카 병영 습격 사건에서 살아남은 일련의 혁명가들이었다.


망명지 멕시코에서 게바라와 그의 친구 파토호는 극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이곳에서 진보적인 여러 정치사상과 이론, 그리고 각국의 민족해방전쟁의 사례들을 공부한다. 그리고 게바라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다. 1955년 여름, 멕시코로 추방당한 피델 카스트로와의 만남은 게바라에게 인생의 전기를 마련해준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당시 쿠바는 풀젠시오 바티스타라는 억압적인 독재체제 하에 있었다. 게바라를 비롯한 망명 쿠바인들은 스페인 외인부대 출신 군인에게 게릴라 교육을 받는다. 1956 11 2582명의 전사를 태운 배가 쿠바로 출발했다. 해안 2Km 전에서 좌초되었고 가까스로 해안에 도착하자 독재자 바티스타의 군대와 비행기가 그들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82명 중 20명만이 살아 남았다.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20명의 게릴라들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독재자 바티스타의 1만 2천여 정규군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1958년 12월, 마침내 바티스타군은 쿠바 전역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게바라 부대는 산타클라라 공격을 통해 마침내 바티스타 정권의 마지막 숨을 끊어 놓게 된다. 1959 1월 1 오전 2 10분 후 풀헨시오 바티스타도미니카 공화국에 망명하자, 1월 8 피델 카스트로아바나에 입성하여, 쿠바 혁명이 달성되었다. 투쟁적인 업적과 헌신적인 작업으로 쿠바 시민권을 부여 받아 쿠바 새 정부의 각료가 되기에 이르렀다.

 

쿠바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성장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토지개혁의 준비에 참가하였다. 1959 11월∼1961 2월에 쿠바국립은행총재, 1961 2부터 쿠바산업부장관도 함께 하였으며 1962에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하여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쿠바혁명 6년 후, 1965 4 체 게바라는 미련 없이 쿠바의 2인자 자리를 떨쳐버리고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혁명전사의 길로 다시 뛰어든 것이었다10개월간 아프리카 콩고를 혁명무대로 삼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1966년 10월 남미의 볼리비아를 찾았다. 미국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제2, 제3의 베트남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혁명전략이었다.


 

콩고 밀림에서 콩고혁명군에게 게릴라 전술을 강의하는 체 게바라

 

해발 2000m 정글에서 수십 명의 다국적군을 이끌며 볼리비아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배신자의 밀고로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고 있던 1967년 10월 8일, 산악마을에서 교전 중이던 체의 장딴지에 총알이 박혔다. 결국 그는 체포됐고, 볼리비아 정부와 미 CIA는 혁명의 바람이 등불처럼 일어날 것을 우려해 사살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10월 9일 오후1시10분, 체 게바라는 두 손이 잘린 채 권총으로 처형됐다. 39세였다. 망가진 시신은 암매장됐고, 잘린 손은 그의 죽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쿠바로 보내졌다.


 

생포된 모습()와 처형 직전의 모습()

 

전설처럼 살다간 인물답게 마지막 순간을 전하는 증언도 목격자에 따라 달랐다. “카스트로에게 전해주시오. 이 실패가 혁명의 종말은 아니라고...” 이렇게 증언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피델이 날 배신했다”며 몇 번이나 카스트로를 원망했다고 전하는 이도 있다.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가 죽었다는 소식에 30일 동안 조기를 게양하고, 그가 체포된 10 8일을 ‘게릴라 영웅의 날’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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