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11일

중국, 티베트 침략

산풀내음 2016. 10. 3. 07:56

195010 11,

중국군, 티베트 진군 개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매우 포괄적인 ‘중화민족’과 ‘하나의 중국’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티베트 정책을 집행했다. 1929년 국민당 정부는 몽장위원회를 설치하고 몽골과 티베트에 관한 업무를 처리했다. 1933년 말 13대 달라이 라마가 사망하자 국민당 정부는 참모부 차장 황무숭(黃慕松)을 보내 조문하기도 했다.

 

이 때 티베트 당국은 라싸에 몽장위원회 사무처와 영국 대표처를 설치하는 데 동의했다. 당시 티베트는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티베트 포용 노력에도 불구, 독립에 도움을 줄 거라는 믿음으로 영국에 치우친 외교 노선을 걸었다.

한편 영국정부의 기본 입장은 티베트를 명목적인 ‘종주국’의 이름 아래 실질적인 자치국으로 유지하면서 중국을 견제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티베트 개혁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1940년대에 들어 티베트에서 독립 추진의 기운이 다시 나타났다. 1941년 친중적인 라쳉 활불이 실각하고 친영적인 따자 활불이 티베트 정권을 장악했다. 1943년 여름에는 까샤에 외교국을 설립했고 1947년에는 티베트 대표단이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범아시아 회의’에 참석했다. 1947 10월 티베트 정부는 상무대표단의 이름으로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외교활동을 벌었다. 대표단은 800만 달러의 차관을 들여와 티베트 화폐의 준비금으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티베트군(Tibetan Army), 티베트군은 1904년에 일어난 티베트에 대한 영국의 침공기간 동안 티베트에서 망명하였다가 1911년 청나라가 멸망한 다음에 돌아온 13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1913년에 창군되었다.

FYI, http://www.tibetan-museum.org/coding/sub6/sub4.asp?mode=view&aseq=7625

 

티베트 정부는 1949 78일에 몽장위원회에 근무하는 한족에게 티베트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1950 1월 티베트 ‘친선사절단’이 영국, 미국, 인도, 네팔 등지에서 티베트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군수지원국을 설립하고 외국에서 대량의 무기와 무선설비를 도입해 민병을 훈련했다. 티베트군 일부를 아리와(黑河), 창두, 진사장 일선에 배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0 1011일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300만 티베트 인민을 해방시키고 중국의 서부 변경에 대한 방위를 공고히 한다는 명분으로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로 진군을 지시했다. 이 전투에서 티베트군 5700명이 죽고 2000여 명이 인민해방군에 투항했다. 중국에 군사적으로 대항할 여력이 없었던 티베트는 저항을 포기했다.


 

중국군의 대학살

 

 

 

1951 523일 중국인민정부와 티베트 정부는 ‘티베트의 평화적인 해방 방법에 관한 협의 17조’를 체결했고 티베트는 중국의 자치구로 편입되었다. 당시 40만 중국군의 티베트 점령, 라싸를 침공하겠다는 위협, 티베트 전체의 파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티베트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는 대한제국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체결한 을사늑약과 마찬가지로 국제법상 효력이 없는 것이다.

 

이어 중국은 장차 있을 무력충돌에 대비 중국과 티베트를 잇는 2000km가 넘는 장거리 도로를 건설하고 라사 부근에 비행장도 건설했다. 티베트에 대한 실질적 장악력을 확보한 중국은 1954년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북경 전인대(全人大)에 초대해 티베트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중국 내 소수민족 지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마침내, 1959년 티베트 온 국민의 무력봉기가 일어났고 티베트의 정부 수반이자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게 되었다. 국제공동체는 티베트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충격적으로 반응했다. 티베트의 문제는 1959년과 1965년 사이 수 차례에 걸쳐 유엔총회에서 논의되었다. 유엔총회는 3개의 결의안을 통과시켜 티베트에서 자행되는 중국의 인권침해를 비난하고 중국이 티베트의 자결권을 포함하여 인권을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The Dalai Lama, wearing ordinary laymans clothes, reluctantly flees Lhasa to continue his leadership of the Tibetan people in exile. He was guarded by Tibetan Khampa figthers known as Tibetan guerillas and the Chushi Gangdrug respectively.

 

하지만 티베트 문화에 대한 파괴와 그 국민에 대한 탄압은 국민봉기가 발생한 후 20년간 더 잔인해졌고 티베트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2십만의 티베트인들이 중국정책의 결과 죽음을 당했다. 더 많은 수의 티베트국민이 감옥과 강제 노동소에 감금되었고, 6천 개 이상의 수도원, 사찰, 문화적 또는 역사적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 유물들은 약탈당했다.


 

2012년 나라를 잃은 죄로 구타를 당하는 티벳인


2008 3 17, 중국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티베트인들


2008318일 인도 뉴델리에서 망명 티베트인들이 중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잡혀가고 있다.


아직도 계속되는 탄압과 학살 중국인들은 일본의 난징대학살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다른 이를 비난하려는 현재 내가 행하고 있는 만행은 중단해야 하는 것 아닌가?

 

1980년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이 티베트를 방문했는데 그는 무력침공 이후 티베트를 방문한 첫 번째 고위관리였다. 그곳에서 목격한 파괴의 정도에 놀란 그는 일련의 급격한 개혁과 파괴의 회복을 위한 정책을 요청했다. 1987년 그가 강제로 사임 당했을 때 그 이유 중 일부는 티베트에 대한 그의 견해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1981년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티베트의 중국체제를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공산체제"라고 묘사한다. 티베트에서 중국정책의 완화는 1979년 후 점진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완화에는 한계가 있어 여전히 탄압이 심각하다.



우리가 일제의 잔혹한 억압의 36년 동안 그토록 간절하게 독립을 원했듯이 티베트인들도 그러할 것입니다. 티베트인들의 독립을 진심으로 간절하게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