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20일

박정희의 멘토였던 황태성, 간첩 혐의로 검거 그리고 ...

산풀내음 2016. 10. 8. 10:00

196110 20,

박정희의 멘토 황태성, 간첩 혐의로 검거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오랜 친구이자 박정희의 멘토였던 황태성(1906 4월 27 ~ 1963 12 14) 1961 10 20일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다.

 

황태성은 1906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중산층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살 되던 1921년 경성공립 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 입학했으나 1924일본인 교장 배척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하다 퇴학 처분을 받았고, 1925년에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10월 항일학생운동과 관련해 또다시 퇴학 처분을 받았다. 항일운동 과정에서 황태성은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 주류적 사상이었던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조선공산당 지역 운동과 함께 조선일보 김천지국 기자로도 활동했다,

 

황태성은 광복 후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조직부장으로 1946 10·1 대구폭동을 주도했고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이때 경찰의 총격으로 숨졌다. 형의 죽음은 박정희가 남노당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고 황태성은 형을 대신해 박정희의 신원보증인이 되었다. 황태성과 박상희는 동갑내기로 둘은 각별한 사이였다. 박상희의 처인 조귀분은 황태성의 소개로 만나 인연을 맺은 것이었다. 당연히 11살 아래인 박정희도 황태성을 많이 따랐다.


 

윗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황태성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군부 내 공산주의자들이 색출, 처형되었다. 이 때 박정희도 발각됐으나 남로당원의 정보를 방첩대에 제공하고 겨우 살아났다. 정보장교로 6·25 때 활약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 박영옥이 김종필과 결혼했다. 조카사위 김종필과 함께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박정희가 여순반란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1961 10 13일자)

 

황태성의 10.1 대구폭동 이후 둘째 아들과 함께 월북했다. 하지만 6.25 이후 김일성은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을 숙청하고 죽였다. 황태성도 무역성 부상 및 무역상 서리를 지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관직에서 밀려났다. 남의 반공주의가 그를 밀어냈고, 북의 파벌주의가 그를 옥죄었다.

 

황태성은 황태성은 5·16 쿠데타가 벌어지자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남북통일 문제를 협의하겠다고 당에 제안했고, 1961 831일 임진강을 건너 서울에 잠입했다. 박정희, 김종필과 접촉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접촉했고, 결국 황태성은 자신의 편지를 박정희의 형수인 조귀분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1961 1020일 중앙정보부에 체포됐다.

 

 


황태성은 재판 내내 자신이 간첩이 아니라남북 협상을 위하여, 또한 남한 정부를 돕기 위하여 밀사의 형식으로왔다고 주장하였지만, 1961 12 27일 육군보통군법회의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62 9 11 2심에서는 항소가 기각되었다.

황태성은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63 131법 적용이 잘못됐다며 황태성에 대한 사형 판결을 파기했다.

 

그러나 군검찰은 공소장을 변경해 형법 98조의간첩죄를 국가보안법과 함께 적용시켰다. 간첩죄는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었다. 1963 72일 파기환송심을 맡은 육군고등군법회의는 이런 논리로 대법원의 파기환송 취지를 무시하고 재차 황태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한편 1963 1 24일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났고 김용순, 김재춘을 거쳐 1963 7월 김종필의 육군사관학교 8기 동기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1963 1015일에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황태성의 존재는 박정희에게 악재라고 생각한 김형욱은 사건을 철저히 숨겼다.

 

그런데 1963년 대통령선거전 당시 윤보선 민정당 대통령 후보 측 찬조 연사였던 윤제술씨는 1963 9 22일 여수유세에서 다음과 같은 열변을 토했다.

"이곳은 여순반란사건이란 핏자국이 묻은 곳이다. 그 사건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은 죽었느냐 살았느냐, 살았다면 대한민국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모른다면 저 종고산은 알 것이다."

 

이 발언으로 대통령 선거 정책대결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윤보선과 박정희 두 후보 간의 전력 폭로와 그에 대한 고발 으름장으로 얼룩졌다. 그 해 9 25, 윤 후보 측은 서울 종로 교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박정희 씨에게 묻는다'라는 유인물을 대량으로 뿌렸다.

- 세칭 북괴간첩 황태성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혀라.

- 황태성은 대구 10·1 폭동 당시 박정희의 실형과 같이 활약했다는데, 그에 대한 진상을 밝혀라.

- 황을 박정희 형수가 수 차례에 걸쳐 면회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이를 계기로 황태성 사건이 세상에 넓게 알려졌다. 하지만 1015일 대선에서 박정희는 전라도 몰표 등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10 22일 대법원에서 황태성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 해 11월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이 다수당이 됐다.

 

황태성은 이번엔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북괴에서 남파된 간첩이 아니고 대한민국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남하한 애국적인 밀사인바 원심은 이런 점을 잘못 보고 지난번의 대통령 선거전에 악용된 그릇된 여론의 영향으로 청구인(황태성)을 극형으로 처단(선고)하였다고 항변했다. 원심 판결에 관여한 재판관, 공소의 제기 또는 그 기초되는 수사에 관여한 검찰관, 정보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하였음이 증명될 것이라고도 항변했다.


그러나 육군고등검찰부는 재심 재판이 진행 중인데도 1963 1214일 오전 11시 토요일 갑작스럽게 황태성을 인천 교외의 군부대에서 총살했다. 1216일 조카사위 권상능이 서울 마포구 서대문형무소에서 피 묻은 주검을 건네 받았다. 그리고 1217일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김학민, 이창훈 저, 황태성 사건 관련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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