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21일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산풀내음 2016. 10. 8. 18:13

1920 10 21,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1920년 만주와 간도 지방에서 독립군의 운동이 활발해지자 2 만 명의 일본군이 대거 간도로 출병해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일본군의 출병 정보를 접한 김좌진의 북로군정 서군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우리 독립군 2800여 명은 백두산 방면으로 이동했다. 그래도 일본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북로군정 서군은 백두산 동북쪽 60km 지점에 있는 청산리 백운평 위쪽 계곡에 포위망을 쳐놓고 전투준비에 돌입했다.

 

1920 10 21일 오전9, 일본군 부대가 중국 지린(吉林)성 청산리 백두산 기슭 험준한 밀림지대 속 깎아지른 절벽 사이 골짜기 좁은 길을 따라 올라오자 매복하고 있던 600여 명의 북로군정 서군으로부터 집중 포화가 시작됐다. 30분 만에 끝난 전투에서 200명의 일본군이 사살됐다. 첫 승리였다.

 

독립군은 일본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을 노인들에게 ‘독립군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사기가 떨어져 허둥지둥 도망갔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기도 하고, 식은 말똥을 두어 독립군이 이미 오래 전 이 곳을 지나간 것처럼 착각하도록 주도면밀 한 작전을 세웠다.

 

다시 김좌진 부대가 밤을 새며 이동한 곳은 120리 떨어진 천수평이었다. 그 사이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이도구 완루구에서 일본군 400여 명을 전멸시켰다. 22일 새벽에 백운평에서 일본군 기병 27연대 소속 1개 중대를 섬멸한 김좌진 부대는 일본군 사단사령부가 있는 어랑촌으로 장소를 옮겼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속에서도 독립군은 언제나 연전연승이었다. 독립군과 일본군 모두 최대 병력을 투입한 어랑촌 전투는 청산리 대첩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올리며 일본군 1,000 ~ 1,200여 명을 사살했다.

 

26일 홍범도 부대가 고동하 골짜기 전투에서 마지막 승리를 장식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사에 찬란한 승전보로 기록된 ‘청산리 대첩’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0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크고 작은 10번의 전투로 이루어진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적의 연대장을 포함해 무려 3,000여명을 살상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


 

청산리대첩을 이끈 북로군정서군(승리후 기념사진, 앞줄에 앉은 사람이 김좌진)


패잔한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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