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22일

미국, 쿠바 해상봉쇄 선언

산풀내음 2016. 10. 8. 18:34

196210 22,

미국, 쿠바 해상봉쇄 선언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흐루시초프 소련 서기장

 

1959년 친미 정권이 바티스타 독재 정권이 피델 카스트로에 의해 붕괴되고 대신 쿠바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였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61년 쿠바 침공이었다쿠바 침공 후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는데 이에 더하여 미국은 1962년 쿠바에 대한 전면적인 경제봉쇄에 들어갔다. 결국 쿠바는 1962 9월 소련과 무기원조협정을 체결해 소련의 미사일을 도입한다.


 

Fidel Castro embracing Soviet Premier Nikita Khrushchev, 1961

 

소련의 지원으로 쿠바에 미사일기지가 건설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미국은 10 14일에 U2 정찰기를 이용, 쿠바 서쪽 4곳에 소련의 미사일 기지가 건설 중이고 일류신28 폭격기도 조립 중에 있음을 항공촬영으로 확인했다.

비록 당시 미소간 핵전력에 있어서 미국이 앞서고는 있다고 하지만 소련이 미국의 동부 해안에서 불과 144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한다면 미국의 핵 우위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미군의 항공정찰 사진에 나타난 미사일 시설물

 

10 16일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국가안보위원회를 소집하였고 선제타격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쿠바를 해상 봉쇄하는 안을 도출하였다. 10 22, 케네디는 TV와 라디오를 통해 “소련이 쿠바에 중거리 미사일 기지를 건설 중”이라는 사실과 함께 “미국과 서방세계의 안전을 위해 쿠바에 무기를 운반하는 선박에 대해 해상봉쇄를 단행한다”는 것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소련측에 14일 이내에 쿠바에 설치된 미사일을 철수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소련은 미국의 쿠바 해상봉쇄에 대해 '해적행위'라고 강력히 반발하면서, 핵어뢰를 탑재한 B-59 잠수함과 화물선 등을 쿠바로 출발시켰다.

 

1962 10 24일 쿠바 봉쇄가 시작됐다. 케네디 대통령의 봉쇄 선언 이후 이틀이 지난 뒤였다. 19척의 함선이 정해진 위치에 도착, 쿠바 동쪽 800km에 원을 둘러치고 그것을 점차 좁혀갔다. 그리고 바로 제2의 원이 2만 명의 해병을 태운 42척의 함선으로 만들어졌다이와 함께 10 24일 미사일 부품을 실은 소련 선박 20척도 정선 지점 근처에 도착했다. 물론 당시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소련의 선박들에 선을 넘지 말라고 지시했다.

 

 

같은 시각 쿠바에 건설중인 소련의 미사일 발사대는 완료단계에 들어갔고 미사일은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발사준비가 완료되면 소련의 미사일은 6분 이내에 반경 25km 안의 미국 전 도시에 도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쿠바 주둔 소련군은 미국의 공격에 대비해 방위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공중방어는 2개 사단이 맡고 있었다. 고도 3만 미터 상공에서 날고 있는 비행기를 격추할 수 있는 미사일 발사대는 모두 144대나 됐다.

 

25일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소련의 유조선이 쿠바로 진입했다. 무기가 실려있지 않은 사실을 확인한 미국은 일단 유조선을 쿠바로 진입시켰다. 26일 바하마 제도 나소의 300km 북동지점에서 다시 새로운 대결이 발생했다. 소련의 화물선이 가시거리에 들어온 것이다. 이번에는 미국이 직접 승선해 무기가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통과시켜 양국은 위기를 넘겼다.

 

교착 상황에서 1026일 흐루시초프가 먼저 해결책을 제시했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두 번째 메시지에서는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도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1027일을검은 토요일이라고 부른다. 13일 중에서 하이라이트였고, 미국 전체 외교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하루였다.


국가안보회의 참석자들은 흐루시초프의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터키의 미사일 철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들의 반발을 초래할 것이며, 미국의 협상력을 약화시키고, 굴복으로 비쳐 여론의 질타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Nikita Kruschev letter to President Kennedy stating that the Cuban Missile Crisis quarantine "constitute[s] an act of aggression propelling humankind into the abyss of a world nuclear-missile war."

 

한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아바나의 소련 대사간에 가서 미국의 공습이 임박했음을 알렸고 이 경우 소련이 미국에 핵공격을 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미국 정찰기를 격추시킬 것을 명령했다. 결국 이런 긴장된 상황에서 10 27일 미국의 U2 정찰기가 쿠바 상공에서 소련제 미사일에 격추되어 조종사가 사망하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10 27일 저녁에 소련과의 비밀채널을 가동했다. 즉 대통령의 동생이자 당시 법무부 장관이 로버트 케네디를 통해 미국 주제 소련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에게 소련이 핵미사일을 쿠바에서 철수하면 쿠바 봉쇄를 풀고 불가침을 선언할 것이며 이와 함께 NATO동맹국의 동의를 얻어 터키의 미사일도 4-5개월 내에 철수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흐루시초프는 10 28일 라디오로 “소련 정부는 쿠바에 있는 무기를 배에 싣고 소련군과 함께 철수하겠다”는 내용을 방송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은 이렇게 지나갔다. 불안과 희망이 교차한 13일간이었지만 3차 대전은 발발하지 않았다. 냉전은 쿠바 위기로 정점에 달했으나 그것은 동시에 대립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소련이 쿠바에서의 폭격기 철거에 동의한 11 20일 미국은 쿠바 해상봉쇄를 풀었고, 12 7일 소련은 공격용 무기를 쿠바에서 철거했다고 미국에 통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3년 미국과 소련간에 핫라인(긴급통신연락망)이 개설됐고, 핵전쟁 회피라는 공통의 과제아래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모스크바조약)'이 체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