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24일

주가 대폭락...대공황 신호탄

산풀내음 2016. 10. 8. 19:19

192910 24,

주가 대폭락...대공황 신호탄

 

1929 10 24(목요일) 아침 뉴욕의 월 가에 있는 주식 시장에서 주가가 사상 유례 없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암흑의 목요일`이라고 불리는 이 날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그 이전까지 치솟기만 하던 주가가 별안간 폭락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식을 팔려고 주식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이제는 주식을 살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 오후 들어 은행가의 큰손들이 방어에 나서 폐장 무렵에는 전날의 주가수준을 거의 회복해 ‘검은 목요일’은 안도 속에 지나갔다.




그러나 5일 후인 29일 화요일 주가는 다시 폭락했고 몇 시간 사이에 주식 시장에 쏟아져 나온 매물이 무려 1,650만 주나 되었다. 하루 동안 다우존스 평균지수가 40포인트나 떨어졌고 100억 달러가 휴지조각이 됐다. 통화금액의 2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미국은 전후에 경제면에서도 세계 제1의 대국이 되었다. 전쟁 시 연합국에 빌려 준 돈으로 말미암아 최대의 채권국이 되었으며 덩달아 뉴욕은 런던을 제치고 국제적인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전쟁 물자로 공급하면서 발전한 중공업은 전후의 번영을 떠받치는 지주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업이 자동차였다. 1차 대전 전만 하더라도 자동차는 사치품이었지만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대전 직전부터 대량 생산모델을 개발하여 전후가 되면서 자동차는 대중 소비품으로서의 위치를 점할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자동차는 연관 효과가 큰 제조업이므로 강철, 기계, 유리, 고무, 전기, 석유 산업, 건설업 등의 산업 발전을 선도했다.

 

포드는 규격화된 부품사용과 콘베이어 벨트에 의한 대량 생산이라는 새로운 생산방식이 출현했다. 이와 같은 생산방식으로 기업의 규모는 점점 커져 갔다. 한편 노동 생산성은 1920년대에 걸쳐 평균 43%나 높아졌다. 하지만 독점 기업에 의한 가격통제 때문에 상품 가격은 내리지 않았고 이러니 소비자의 구매력은 늘 수 없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임금은 20년대에 10% 정도 올라갔으나 그것이 전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년대 초보다 떨어졌다. 노동절약적인 새 기계들이 도입되며 기술적 실업이 생겼다. 실업률은 20년대 내내 비교적 높아서 7%를 유지했다. 실업보험이나 연방정부의 복지계획이 아직 없었으므로 지속적인 실업은 빈곤과 구매력의 저하를 의미했다.

 

반면 소수 상류계급으로의 부의 집중은 더욱 심화되어 1929년에 가장 부유한 국민 1%가 국부의 60%를 점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1963년의 32.5%, 1983년의 41.8%에 비하면 약 1.5배에서 두 배 가량 되는 수치이다. 게다가 과세율도 낮았으므로 상류층의 저축은 더욱 늘어갔다. 최상층 6만 가구의 저축액이 하층 2,500만 가구의 저축액보다 더 많았다. 이렇게 국민소득의 더 많은 부분이 상층에 집중되며 경제는 점점 이들의 소비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소비는 경제에 활력을 줄만큼 크지는 않았다.

 

한편 이렇게 쌓인 돈은 생산적인 투자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투기로 향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증권 시장으로 달려 갔다. 이러한 주식 열풍은 당시의 호경기와 맞물려 주가를 천정부지로 치솟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상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가고 있었다. 승용차 판매 대수는 1927년의 경우 전년의 80%에 불과했고 주택 건설도 1926년 절정에 달한 이후 1929년까지 35%나 감소했다. 특히 1929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공업 생산, 가격의 하락은 눈에 띄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아직 주가는 1924년부터 계속 올라갔고 9 19일 그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절정은 곧 낭떠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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