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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폰사, 나일론 명명 및 상품화 계획 발표

산풀내음 2016. 10. 9. 23:08

193810 27,

듀폰사, 나일론 명명 및 상품화 계획 발표

 

나일론의 명성에 비하자면 그 개발자의 이름은 오히려 그늘에 가려져 있는 편이다. 그 비운의 주인공은 월리스 흄 캐러더스(Wallace Hume Carothers, 1896 4월 27 ~ 1937 4 29)라는 화학자다.

 

월리스 흄 캐러더스

 

1896 4 27, 미국 아이오와 주 디모인에서 태어난 캐러더스는 타키오 대학과 일리노이 대학에서 유기화학을 공부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모교의 강사로 일하던 캐러더스는 1926년 하버드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캐러더스의 인생에서 중요한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27년에 듀폰 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으면서부터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연합국 측이 사용한 폭약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공급한 결과, 듀폰은 막대한 이익과 함께 ‘죽음의 상인’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얻었다. 듀폰은 이후 생활용품 사업 쪽에 주력하며 자선사업을 크게 펼치기도 했지만, 당시의 여러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모습을 남긴 것도 사실이었다.

 

듀폰의 집요한 설득에 마침내 그 회사의 연구실로 자리를 옮긴 캐러더스는 당시 화학계에서 큰 관심의 대상이었던 중합체(Polymer) 연구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1929년에 캐러더스는 알코올과 산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에스테르(ester)라는 화합물을 연결하여 폴리에스테르(polyester)를 최초로 개발했다. 그리고 1934 5 24, 캐러더스의 연구팀 소속인 도널드 코프먼(Donald D. Coffman)이 최초의 폴리아미드(polyamide) 섬유 합성에 성공했다.

 

마침내 1935 2 28, 석탄(나중에는 석유)의 부산물인 벤젠이라는 값싼 물질을 원료로 한 초중합체가 완성된다. 처음에는 6-6이라는 암호명으로 지칭되던 그 물질 (폴리헥사메틸렌아디파미드)로부터 천연 섬유보다도 더 튼튼하고 탄력이 있으며 색깔이 고운 섬유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듀폰에서는 훗날 이 물질을 상품화하면서 ‘나일론’이라는 신조어를 상표명으로 붙였다.

 

듀폰은 이 합성섬유가 자기 이름도 갖기 전인 1938 2월에 첫 상품을 냈다. 칫솔이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주로 돼지 털로 된 칫솔을 사용했다. 15세기 말 중국 황실에서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돼지 털이 실로 450여 년 만에 인간의 이()와 작별을 고한 것이다. 캐러더스는 1년 전에 자살하는 바람에 공치사를 들을 기회를 놓쳤지만 듀폰은 상품화에 박차를 가했다.

 

 

1936년에 캐러더스는 기업 소속 유기화학자로서는 최초로 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예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발작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가 하면, 이듬해 초에는 여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1937 4 28, 그는 한 호텔에 투숙한 다음, 늘 갖고 다니던 청산가리 캡슐 속 내용물을 레몬주스에 타서 마셔 버렸다. 41번째 생일을 맞이한 지 겨우 하루가 지난 뒤였다.

 

그리고 1938 10 27일 듀폰은 합성섬유의 이름(브랜드)을 ‘나일론(Nylon)’으로 하고 이를 이용한 본격적인 상품화 계획을 발표했다. 나일론(nylon)이란 명칭은 캐로더스의 허무한 죽음에서 따온 ‘니힐(Nihil)’과 듀폰(Dupont)의 ‘온(on)’을 합쳐 만들었다.

 

1950 515일 미국 대도시의 백화점에는 ‘석탄과 물, 공기가 당신의 몸을 감쌉니다’라는 펼침막이 내걸렸다. 백화점이 문을 열기 몇 시간 전부터 수많은 여성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이 사려는 물건은 스타킹이었다. 시판 첫날부터 미국 전역의 시선을 모은 이 스타킹 재료는 바로 나일론이었다.

 


첫 나일론 스타킹을 신고 있는 여성들()와 스타킹을 검사하고 있는 모습()

나일론 스타킹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모습


Marie Wilson was recruited by DuPont Co. when it needed a real model for its giant nylon leg used to market the new material.

A woman buys nylon stockings from an automated machine in the 1950s.

 

‘나이롱 환자’나 ‘나이롱 대학생’에서는 ‘가짜’나 ‘싸구려’의 의미가 담겨 있지만, 첫 시판 당시 나일론 스타킹은 기존의 실크 제품보다 2배나 비쌌다. 실크보다 질기고, 면보다 가벼우며, 신축성이 뛰어난 나일론 스타킹은 불티나게 팔렸다. 바로 이때부터 여성들이 다리 털을 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판 첫날 미국 전역에서 팔린 나일론 스타킹은 약 500만 켤레로서 스타킹을 만든 듀폰사는 첫해 900만 달러, 이듬해 25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이후 중합체 기술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20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화학자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중합체 관련 일을 하게 되었다.

 


나일론의 영향력은 단지 의류 시장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낙하산과 타이어, 밧줄과 텐트 등의 군수품 제조에도 사용되는 바람에, 스타킹을 비롯한 기타 제품의 생산이 잠시 중단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어떤 여성들은 낙하산 제조에 이용해 달라며 각자의 스타킹을 국가에 헌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3년부터 나일론이, 1967년부터 폴리에스테르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오롱(KORLON)’은 이 회사의 뿌리 기업인 한국나이롱이 1963년에 처음 생산한 제품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국(Korea)’과 ‘나일론(Nylon)’을 합성한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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