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30일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에 KO승

산풀내음 2016. 10. 10. 20:29

197410 30,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에 KO

 

1974 10 30일 아프리카 자이레(오늘날의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에서 세계 권투 역사상 길이 남을 명승부가 펼쳐졌다.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942 1월 17 ~ 2016 6 3)와 조지 포먼(George Foreman, 1948~ ) WBC, WBA 세계 헤비급 챔피언전이었다.

당시 알리는 무관(無冠)이었고, 포먼은 1973년에 조 프레이저를 누르고 처음 세계 챔피언이 되었고 전문가들은 당분간 그의 적수를 찾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1974년 ‘정글의 혈전(The Rumble In The Jungle)’이라 불린 조지 포먼과의 세기의 복싱 대결을 위해 아프리카 자이르 킨샤사를 방문한 무하마드 알리.

 

체력의 소모가 많고 상대방의 파워에 영향 받기 쉬운 권투의 경우 대게 30살이 넘으면 선수의 생명이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상적이었기에 당시 32세의 알리는 복서로서는 황혼기라 할 수 있고, 25세의 포먼은 무적으로 여겨졌다.

 

경기 초반부는 포먼에게 유리해 보였다. 포먼은 특유의 쇠망치 같은 펀치로 알리를 몰아붙였다. 한 대만 제대로 맞아도 뻗어버릴 듯한 주먹이었다. 알리는 로프에 기대 포먼의 주먹을 막아내기에 급급했고, 간혹 잽을 날려 포먼의 공격을 견제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세는 알리의 계산에 포함돼 있었다. 스피드와 기술이 뛰어난 알리는 포먼의 초반 공격을 막아낸 뒤 반격할 계획이었다. 라운드가 진행되면서 포먼의 공격력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때리다 지친 격이었다.

 

8라운드에 접어들어서도 로프에 기대 있던 알리는 포먼의 주먹이 흐느적대자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도전자 알리는 종반 챔피언 포먼의 턱에 날카로운 원투 스트레이트를 터트렸다. 휘청거리던 포먼은 알리의 오른손 피니시 블로를 맞고 그대로 매트에 쓰러졌고 포먼은 심판이 10을 셀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알리는 7년 전 잃어버린 타이틀과 함께 미국 정부에 의해 실추된 명예도 되찾았다.

 

 

TV 위성중계로 이를 지켜보던 전세계 복싱팬들은 `의외의 결과`에 경악했다. 그리곤 약속이나 한 듯 `역시 알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포먼은 KO 92.7%(4037KO)를 자랑하던 `무패의 철권`. 복싱실력이 알리에 못지 않다던 조 프레이저를 6번이나 다운시키고 챔피언에 올라 `사상 최강의 주먹`으로 평가 받던 선수였다.

 

알리는 켄터키 루이빌에서 태어났으며, 1964 맬컴 엑스 등이 이끄는 이슬람운동에 가담하기 전까지 이름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Cassius Marcellus Clay, Jr.)였다.

 

알리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고향에 금의환향 했지만 동네 식당에서조차 식사제공을 거절당하며 변함없이 '깜둥이'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모습에 울분을 느껴 금메달을 오하이오강에 던져 버린다. (IOC 1996년 아틀란타올림픽 때 새로 제작한 금메달을 그에게 선사한다.) 그는 '백인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길 거부했다. 말재주가 뛰어났지만 언제나 직설적이었기에 그에겐 '루이빌의 입(The Louiville Lip)'이란 별명이 붙었다. 우리에겐 '떠벌이 알리'로 알려진 그다.


Ali, then known as Cassius Clay, at the 1960 Olympics (second from right)

 

그는 1964년 도박사들의 17 열세를 비웃으며 소니 리스튼을 KO로 누르고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1960~70년대 그의 인기는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던 비틀즈의 인기를 뛰어 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당시가 미디어의 유아기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전지구적 인기는 가히 괴력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백인들 앞에서는 말수가 적어야 한다는 종전 흑인 복서의 불문율을 깨고 그는 유머 넘치는 수다와 쇼맨십으로 사랑받았다. 힘과 덩치만 강조되던 헤비급의 링 안에서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경쾌한 발 놀림과 빠른 펀치로 세계 권투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딴 순간, 그가 선언한 한마디는 백인 중심의 당시 미국사회에 대한 공공연한반기로 기록된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한술 더 떠 이 떠버리 복서는 급진적 흑인운동가 말콤 엑스와 공공연히 교류했고이슬람 네이션활동에 가담했다.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라는 기독교적 이름을 버리고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슬람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미국의 우상은 단숨에미국의 골칫거리가 되어 미국 주류 사회를 가격했다.

 

베트남전이 격화되던 1967년 징집되자 그는 죄 없는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그런 전쟁에 내가 왜 가야 하냐면서 기자들을 향해 "난 베트콩하고 싸울 일 없어요(I ain't got no quarrel with them Vietcong)"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베트남 사람들은 나를 깜둥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총을 들이 댈 이유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징병 거부가 불량한 것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죄악시 되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알리의 징병 거부는 반전운동의 불씨가 된다. 그는 영화, 음악, 스포츠계를 망라해 징병반대와 반전의 기치를 내걸었던 최초의 인물이었고, 결국 반전의 상징적 존재가 된다. 그 대가는 엄청났다. 챔피언벨트는 물론 선수자격까지 박탈당하고 무려 3 6개월간 링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징병거부로 5년 형을 선고 받았지만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투쟁 끝에 결국 무죄판결을 받는다.

 

반전 분위기와 흥행카드를 원하는 복싱계의 바램 속에 복귀한 알리는 1970 10월에 성공적으로 복귀 전을 치렀지만, 1971 3 8일 헤비급 챔피언 조 프레이저에게 도전해 판정패 했다. 벌써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 후 알리는 포먼에게 챔피언 자리를 빼앗긴 프레이저를 상대로 리턴매치에서 판정승하면서 1974년 포먼에게 도전할 수 있었다.


Joe Frazier, George Foreman, Muhammed A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