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9일

나치, 유대인 학살 시작

산풀내음 2016. 10. 13. 20:53

193811 9,

나치, 유대인 학살 시작

 

1차 세계대전 후 맺어진 베르사유조약으로 독일의 경제 상황은 최악으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1923 1프랑스레몽 푸앵카레 정권은 벨기에와 함께 군대를 파병하여 독일의 루르 지방을 점령한다. 독일이 프랑스가 요구한 거액을 보상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었다. 이에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는 바이마르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이런 가운데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은 점점 그 세력을 키워나갔고 히틀러는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1차 대전 패배의 원인을 독일인이 아닌 유대인의 배신과 무능으로 돌렸다.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 대륙에 팽배해 있었던 반유대주의를 이용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유대자본을 강제로 흡수하기 위한 면도 있었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이미 나치 이전에 스페인 종교재판소가 기독교도 사이에서 유대인을 색출하고자 광란의 검거선풍을 일으켰고, 14세기 후반에 촉발된 폭력적인 박해, 이교도를 비롯한 대규모 인명의 처형, 1492년에 유대인 15만 명을 대량으로 추방한 것, 영국, 프랑스, 독일 제 연방, 그리고 스페인과 포르투칼에서의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친 대대적인 유대인 추방 등은 이미 나치학살 전에 유럽사람들이 유대인을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런 박해는 18, 19세기에도 계속되었다.

 

1931, 전세계를 강타한 경제 대공황은 반유대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대중들은 분노했으며, 전부터 쌓여왔던 반유대주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히틀러는 연설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의 연설도 반유대주의가 설파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33나치당의 당수 아돌프 히틀러가 제국수상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나치의 유대인 탄압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유대교 회당 방화, 돌격대의 유대인 상점 습격 등에 이어 1933 4월 히틀러는 유대계 상점 보이콧 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모든 유대인들이 전문직과 공무원직에서 사퇴할 것을 종용하는 법안이 통과됐고 괴벨스의 주도하에 유대인들이 저술한 책들에 대한 분서행위가 독일 전역의 대학가에서 일어났다. 한편 유대인에 대한 독일 국적 부여가 제한되기 시작했고 유대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구역도 생겨났다. 더 나아가 19359 15일 뉘른베르크법이 시행되면서 모든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성관계 결혼이 불법화되었다.

 

마침내 1938 11 9일부터 나치의 국민 계몽 선전부장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 10월 29 ~ 1945 5월 1)에 의해 주도된 유대인 학살이 독일 전국토에서 자행됐다. 한 유대인 청년이 7일 밤 파리 소재 독일대사관원을 사살했고 유대인 전체가 이 범죄에 가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를 유대인 대박해(Kristallnacht, 혹은 Pogrom이라고 한다.


1934년 베를린에서 연설하는 괴벨스, 1945 히틀러가 자살한 후 나치의 총리에 올랐으나, 이튿날 총리 관저의 대피호에서 부인 마그다 괴벨스와 자살하고 6명의 아이들(1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독약을 먹여 같이 자살하였다.

 

이미 반쯤 미쳐 날뛰던 나치정권은 이날 밤 전독일의 유대인 교회와 상점, 주택에 불을 지르고 수만 명의 유대인을 체포했다. 4백여 명은 현장에서 무자비하게 살해됐다. 경찰집계에 의하면 814채의 상점, 171채의 주택이 파괴됐고 191채의 유대교 교회가 방화됐다이 같은 일련의 유대인 박해는 주로 SA대원에 의해 자행됐는데 그들은 이날 밤에만 35000여명의 유대인을 체포,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은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뿐만 아니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1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하였고 이를 후세는 Holocaust라 명명했다. 사망자 중 유대인은 약 6백만 명으로 당시 유럽에 거주한 유대인의 2/3에 해당하는 수였다. 유대인에 대한 살해는 어린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토에 수용한 후 화물 열차에 실어 집단 수용소로 이송하였다.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 과로사 하는 경우도 있었고 총살로 처형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을 총살했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우선 처형 속도가 문제였으며 이와 더불어 탄약 문제도 심각했다. 둘째 부대원들에게서 심리적인 부작용 현상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독가스를 이용한 대량 학살이었다.

 

1941 9,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이 처음으로 아우슈비츠의 독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독가스실에서는 한 번에 약 2,000여명의 수용자를 학살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 즉시 선별되어 보내졌다. 독가스실은 대개 샤워실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에게 샤워를 하라고 하여 옷을 벗게 한 뒤, 가스실에 보내어 학살하였다.

 


 

나찌의 유대인 학살 사진 들

서로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

 

1942년 우크라이나 비니챠(Vinnitsa) 인근에서 시체를 매장시킬 구덩이를 미리 파 놓고 유대인을 학살

아들을 살리기 위한 모정

유대인 여성을 처형하고 있는 SS여성대원









살생의 업보를 지은 이들은 참회의 시간을

그리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들은 용서와 함께 극락왕생을...


악연의 굴레를 끊고 참 인연을 맺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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