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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복서 김득구, 권투경기 중 의식불명. 4일 후 사망

산풀내음 2016. 10. 14. 23:59

1982 11 14,

프로복서 김득구, 권투경기 중 의식불명. 4일 후 사망

 

1982 11 14(한국 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팰리스 호텔 특설링에서 프로복서 김득구 선수와 챔피언 레이 붐붐 맨시니 선수간의 WBA(세계권투협회) 라이트급 타이틀 매치가 벌어졌다.

 

맨시니는 흑인들이 판을 치던 미국 권투계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백인 스타였다. 몇 년 전 니카라과 마나과 시장까지 하다가 의문의 자살을 했던 전설적인 복서 알렉시스 아르게요에게 아깝게 패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진 적이 없는 상승의 스타였다. 하지만 김득구는 동양챔피언이라는 것 말고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복서였다. 화려한 아마튜어 전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KO왕으로 인기몰이를 한 것도 아니었다. 전문가들 그 누구도 김득구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없었다.


 

13라운드까지는 난타전이었다. 하지만 9라운드를 넘기면서 김득구의 체력이 달리는 것이 눈에 보였고, 13라운드에서는 그로기 상태로까지 몰렸다. 그리고 14라운드. 김득구는 판정으로 가서는 가망이 없다는 듯 탱크처럼 밀고 나왔다. 하지만 19초가 막 지났을 때 김득구가 맨시니의 강력한 레프트 훅과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턱에 맞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일어나지 마라 그냥. 잘했다. 일어나지 마라.” 화장실도 안 가시고 경기를 지켜보시던 아버지의 한 마디였다. 로프를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심판의 카운트는 끝나 있었고 그는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가 약속한 것처럼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는 말이 슬프게도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의식을 잃은 김득구는 급히 데저트스프링스병원으로 옮겨져 긴급 뇌수술을 받고 처절한 생존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99시간 만인 11 18일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때 그이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급거 미국으로 날아간 어머니가 미국 법원에서 “내 아들 득구는 죽었습니다.”라고 사망 선고를 내리고 그 장기는 동양계 미국인들에게 기증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세계 복싱계는 거센 논쟁에 휩싸였다. 뉴욕타임즈 등 언론에서 복싱의 잔혹성을 지적하였고 미국 하원에서는 이 문제로 청문회까지 열렸다. 결국 세계복싱 양대 기구는 경기를 15회에서 12회로 줄이고 스텐딩다운제를 도입하는 등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였다.

 

또한 많은 후유증도 양산했다. 당시 약혼녀였던 이영미는 뱃속에 3개월 된 아기가 있었다. 이는 당시 보상금으로 받은 상당한 금액의 상속과 관련이 있어서 친자 여부 등 상당 기간 논쟁거리였다. 게다가 김득구의 모친은 우울해하다가 3개월 뒤 유서에 "내가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아들을 죽인것이다"라 쓴 채 농약을 마시고 아들의 뒤를 따라갔다.

경기 심판 리처드 그린은 선수가 위험한 상태임에도 계속 시합을 강행시킨 끝에 김득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7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레이 맨시니도 김득구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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