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19일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이스라엘 방문

산풀내음 2016. 10. 18. 20:22

1977 11 19,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이스라엘 방문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1977 11 19일 밤 30년 동안 적대해온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아랍국가에서 국가원수가 이스라엘을 방문한 것은 이스라엘 건국이래 처음이었다. 베긴 이스라엘 수상은 철저한 경계가 진행되는 가운데 벤 구리온 공항에 도착한 사다트 대통령을 영접했다. 온건파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은 사다트 대통령이 11 9 `필요하다면 이스라엘 국회도 가겠다`고 발언하자 베긴 수상이 이에 응답해 11 15일 초청장을 보낸 것이 계기가 됐다. 방문 이틀 후인 20일 사다트는 이스라엘 국회에서 연설했다. 연설에서 사다트는 중동의 지속적인 평화를 호소하면서 이스라엘 점령지역의 철수와 팔레스타인 국가수립을 주장했다.

 

Egyptian President Anwar Sadat greets Israeli Prime Minister Menahem Begin upon his arrival for his historic visit Nov. 19, 1977, at Israel's Ben Gurion Airport.

1977년 이스라엘 방문 때 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 직후

 

안와르 사다트 (Anwar El Sadat, 1918 12월 25~1981 10월 6) 1918년 이집트의 미트아부알쿰(Mit Abu al-Kum)에서 태어났다. 1938년 이집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다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반영 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1950년 낫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에 가입했으며, 이 조직의 일원으로 1952년 낫세르를 따라 이집트 무하마드 알리 왕조를 전복하는 군사 쿠데타에 적극 가담했다. 쿠데타를 시작하면서 사다트는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고 왕정전복을 기도하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이집트 국민들에게 방송했다.

 

왕정이 무너진 이집트는 공화정이 되었으며 초대 대통령은 쿠데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무하마드 나기브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 쿠데타를 주도한 낫세르와 나기브 사이가 벌어진 후 사다트는 낫세르를 지지했고 1956 2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낫세르를 지지했다.

이후 사다트는 낫세르 대통령 집권 기간 중 2차례(1964 ~ 1966, 1969 ~ 1970)의 부통령직을 포함하여 여러 직책을 거쳤으며 1970년 낫세르 사망 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이집트 공화국의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나세르와 사다트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사다트는 대외 관계 개선에 노력을 기울여 특히 서방과 관계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1967 6일 전쟁 이전 국경으로 물러서야 한다고 UN에 강조했다. 이는 6일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점령하고 있던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라는 요구였지만, 이스라엘은 이 조건을 거부했다.

 

결국 1973 10 6, 시리아와 연합한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기습 선제 공격하면서 제4차 중동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이는 사다트가 시나이 반도를 그대로 이스라엘에 뺏긴 상태에서는 국내에서 아무런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비록 전쟁의 결과는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고, 사다트는 낫세르 시대에 잃었던 영토를 되찾은 사람으로 이집트 국내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1976년에는 전통적인 소련과의 우호 조약을 깨고, 소련 기술자들을 내쫓았다. 그리고 외교 노선을 미국 쪽으로 돌렸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당시

 

1976년 대통령에 재선되고 1977 11 19일에는 아랍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이스라엘 의회인 크네세트에서 평화 계획을 제안했다. 이집트로 귀국한 사다트는 환호하는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아랍 강경파는 그를 비난하고 리비아와 시리아는 이집트와 단교했다. 다마스커스 베이루트 바그다드 등에서 이집트 정부 관계자가 피습 받기도 했다.

 

사다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78 9월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 하에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과 13일간에 걸친 장시간 회담을 열어 마침내 9 17일 중동평화협정(캠프 데이비드 협정) 문서에 조인했다. 협정의 내용은 '시이나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고 5년 내 요르단강 서안 및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다트와 메나헴 베긴은 공동으로 그 해 12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79 3 26일에는 아랍권 및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워싱턴 D.C.에서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후 이집트에는 소련 대신 미국의 군사 지원이 제공되었고, 오늘날 이집트 육군은 M1A1 전차를 비롯한 미국제 무기를 상당히 많이 수입한 국가가 되었다.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당시

On March 26, 1979, President Jimmy Carter with President Anwar el-Sadat of Egypt and Prime Minister Menachem Begin of Israel at the treaty ceremony.

 

그러나 사다트는 서방권에서 인기는 올라갔으나 정작 이집트 국내에서는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 자체를 반대하는 세력이 강력히 반발했고, 여기에 경제 위기까지 발생하여 인기가 떨어져갔다. 결국 1981 10 6일 수에즈 운하 도하 기념 군사 퍼레이드 중 소련의 사주를 받은 과격 이슬람 원리주의자 할리드 이스람불리와 다른 2명의 공범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날은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의 선제 공격으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날이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들과 서방 국가들의 정상들이 참석하였으나, 그를 저지한 아랍 국가들과 공산주의 국가들의 정상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1981 10 6, 사다트 대통령 암살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