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21일

독립문 기공

산풀내음 2016. 10. 18. 22:08

1896 11 21독립문 기공

 

독립협회는 한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며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영은문(迎恩門)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뜬 독립문을 세웠다. 즉 청나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표출된 상징물이다.

 

 

독립문 건립 전의 영은문

 

당시 조선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중국과의 오랜 조공 관계에서 벗어나 있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이 전쟁을 끝내며 1895 4 17일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 1조는 이렇다.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자주독립에 해가 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 일본이 청나라에 그런 요구를 한 건 아무 간섭 없이 조선을 삼키려는 정지작업이었을 뿐이다.

 

서재필이 주도하였고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각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설계를 담당했고, 토목·건축공사는 심의석이 담당했다. 중국인 노무자가 노역을 맡았으며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 독립문은 중앙에 14.28m, 너비 11.48m의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문 앞은 영은문의 주추였던 돌기둥이 두 개 있다. 문의 주재료는 화강암이다.

1978년 성산대로 건설로 인해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80m정도 북서쪽으로 이동해서 복원시켜 놓은 것이 오늘날의 독립문이다.

 

1895년부터 독립문 건립을 위한 백성들의 모금을 시작하였고 1896 11 21일에 꽤나 시끌벅적하게 기공식을 가졌다. 하지만 독립문의 준공 날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48년에 나온 서재필의 자서전에 1897 11 20일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자서전이 나온 시기와 준공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상황이라 정확성에 의구심이 제기된다. 한편 1897 11 14일 또는 16일이라는 기록도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문제는 준공시점이 아니라 독립문의 건립을 이끌었던 주체 세력 가운데 상당수는 이내 친일 세력으로 돌아섰거나, 개중에는 심지어 일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작위를 받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결국 독립문의 설립의 근본 취지에 의구심이 생길 정도이다.

 

여기에 더하여 1999년에 출간된 윤덕한의 ‘이완용 평전’이라는 책에 따르면, 독립문 상단 앞뒤에 한자와 한글로 '독립문'이라고 새겨진 글씨(獨立門(무악재 쪽)과 독립문(영천시장 쪽))가 이완용이 쓴 것이 백 퍼센트 확실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글씨체가 굵고 힘있는 이완용의 전형적인 필체이며, 그는 당대 제일의 명필로서 이미 궁중의 여러 전각 현판을 쓴 경력이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또한 이완용은 그 당시 독립협회의 발기인 가운데 보조금도 가장 많이 냈고, 위원장으로서 독립문 건립 사업을 주도했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창립총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된 이완용은 협회에 100원을 내는 등 독립문 건립에 크게 기여했다. 쌀 한 가마에 56원 하던 때다. 그는 1896 11 21일 독립문의 주춧돌을 놓는 정초식에 모인 수천 명의 동포 앞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해치려고 한다면 구라파에 있는 폴란드란 나라처럼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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