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5일

미국 금주법 14년 만에 해제

산풀내음 2016. 10. 25. 23:11

1933 12 5,

미국 금주법 14년 만에 해제

 

1933 12 5일 미국의 유타주가 금주법을 정한 수정헌법 제18조를 무효화하는 수정헌법 제21조를 36번째로 비준함으로써 미국의 4분의 3에 달하는 주()가 금주법을 폐지해 역사상 유례가 없던금주시대가 미국에서 막 내렸다.

 

1) 금주법 제정 배경

 

1917 8 1일 미국 하원의원 볼스테드(Andrew John Volstead, 1860-1947)가 전국 금주법(National Prohibition Act)을 발의하였고 상, 하원을 통과한 법률을 당시 민주당의 윌슨 대통령은 1917 10 27일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공화당의 힘으로 법률은 같은 날 다시 하원을 통과하였고 다음 날인 10 28일 상원까지 통과함으로써 대통령의 거부권은 무력화되었다. 이 법은 통상 발의자의 이름을 따서 볼스테드법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냥 법이 아니었다. 아예 수정헌법 제18조로 못 박은 것이었다.

 

미국 수정 헌법 제18(Amendment XVIII)1917 12월 18에 의회를 통과했고 당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알코올 2.75% 이하의 주류를 제외하는 것을 의회에 제의했지만 실패했다. 1920 1월 16 3/4 (당시 36)의 비준이 완료되어 헌법 수정 조항이 익일인 1 17일에 발효되었다.

 

결국 미국 수정 헌법 18조와 볼스테드법에 의해 미국 내와 그 관할에 속하는 모든 영역 내에서 음용할 목적으로 주류를 양조, 판매 또는 운송하거나 미국에서 이를 수입 또는 수출하는 것을 금지되었다.

 

미국 하원의원 볼스테드(Andrew John Volstead, 1860-1947)

 

미국에서 금주를 법으로 강제한 것은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인 1657년 당시 메사추세츠 의회는 독주의 판매를 금지하였다. 이후 이민자가 대거 유입되면서 술 소비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당연히 사회문제와 연결되었다. 이에 1826년 보스턴에서는 미국금주협회(American Temperance Society)가 결성되었고 술과의 전쟁이 선포되기도 하였다.

 

이후 감리교를 중심으로 금주운동이 활성화되었고 1851년에는 메인주가 미국 최초로 금주법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남북전쟁(1861-1865)으로 잠깐 주춤하였다가 1878년 기독교여성금주회(Women’s Christian Temperance Union)가 발족하면서 다시 활발해졌다.


대표적인 회원이 캐리 네이션(Carrie Nation, 1846-1911)이다. 그녀는 첫 남편을 알코올 중독으로 보내고 술에 대하여 강한 혐오감을 가졌다. 1899 6 5일 금주운동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중 그녀는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자신을 "예수의 불독"으로 자칭하며 술집을 폐쇄시키기 위해 직접 도끼질을 하였고, 30번이나 체포되기도 했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활동은 여성들의 큰 지지를 받아 기독교여성금주회 회원들은 그녀와 함께 도끼질에 동참했다.

 

한 손에는 도끼,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는 캐리 네이션

Women's Christian Temperance Union, 나랑 키스할려면 술먹지 말라는 논리인데 ....

 

1881년 캔사스주가 미국 최초로 금주법을 주 헌법에까지 삽입시켰고 이후 남부의 주들이 하나 둘씩 금주법을 제정하기 시작하였다. 전국적인 금주를 지양한 볼스테드법이 발의된 시점에는 모든 주중 2/3가 금주법을 주 자체적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겠지만 당시로선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다. 우선 미국의 청교도적 전통이었다. 19C~20C초 이민자들이 몰려들고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미국은 초기의 경건한 기풍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자 개신교를 중심으로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특히 도시지역의 과도한 음주 풍조가 큰 문제로 지목되었다.

 

이것은 농촌지역과 도시지역의 문화충돌이기도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이민자 그룹들과 전통적인 청교도들의 충돌이기도 했다. 가톨릭이었던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 이민들은 상대적으로 음주문제에 관대했는데 경건한 청교도들의 눈에는 이들이 여러모로 미국의 전통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금주운동은 이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은 이렇게 시작된 금주운동을 더욱 강화시켰다. 독일 U보트의 공격으로 미국상선이 침몰되자 미국은 1917 4 6일 본격 참전을 선언하고 4 10식량통제에 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곡물 전용을 제한하기 위함이었다이에 따라 위스키 등 증류주의 제조를 중단시키고 맥주 도수도 2.75%까지 낮추도록 했다. 그런데 독일에 대한 증오심이 독일계 이민자들의 맥주양조업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번져 아예 금지시키려는 분위기가 일었다또 한편 때마침 여성의 참정권이 확립되면서, 여성의 표를 얻기 위해 금주령에 대한 입법이 주장되기도 했다.

 

디트로이트 시경찰국의 밀주 단속.

1920, 금주법 시행으로 술을 버리는 장면

1921년 시카고에서 적발한 술을 쏟아버리는 주류 단속원


1930년 시카고의 한 약국 앞에서 금주법 위반으로 영업정지가 되었다는 안내서가 붙어있다.

 

2) 금주법의 폐해

 

당시 미국에는 이미 주류(酒類)산업이 상당한 규모로 성장해 있었다. 버드와이저로 유명한 안호위저 부시(Anheuser Busch)를 비롯해 여러 업체들이 전국적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당연히 모두 합법적 기업들이었다그런데 금주법은 주류산업을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합법적 기업가들의 손에서 뺏어 엉뚱한 자들에게 넘겨주는 결과만 초래했다. 이 거대하고 이윤 많은 산업이 조직범죄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금주법 시대(1920~1933)는 갱들의 시대였다. 갱들은 금주법이 만든 것은 아니며 그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하지만 급격한 성장은 거의 전적으로 금주법 덕분이었다영화 <대부>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계 마피아의 경우가 특히 그러했다. 이탈리아계 갱들은 원래는 아일랜드계나 유태계에 비해 뒤처져 있었다. 그런데 금주법이 이탈리아계에 기회를 줬다. 대거 주류 밀매에 뛰어든 이탈리아계는 전방위적으로 사업을 확대해 급성장을 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시카고를 거점으로 했던 알 카포네(Al Capone, 1899-1947)였다. 


 


알 카포네는 이탈리아계이기는 했으나 마피아에 소속되지는 못했었다. 마피아는 이탈리아계 중에서도 시칠리아계가 아닌 자는 단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 카포네는 독자적으로시카고 아웃핏(Chicago Outfit)’을 이끌며 폭력과 살인으로 주류 밀매를 장악, 세력을 구축했다그러자 뉴욕 중심의 정통 마피아에게도 대접을 받게 됐는데 알 카포네는 당연히 기회를 공유하는 것으로 그에 보답했다. 이탈리아계 갱들은 이렇게 해서 전반적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들의 성장은 치안도 치안이지만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들이 당연히 만들어낸 지하경제와 검은 돈의 문제였는데 이게 규모가 너무 컸다1927년 알 카포네의 한 해 총 수입은 1억 달러에 달했다. 그러니 전성기 시절 시카고는 사실상 알 카포네의 손아귀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 공무원, 경찰, 언론인 등 그에게 매수당하지 않은 자들이 거의 없었다.


알 카포네는 1931년 체포됐다. 체포한 자는 시카고 경찰이 아닌 연방 재무부의 파견수사관 엘리엇 네스(Eliot Ness)였다. 체포 명목은 탈세였다. 알 카포네는 11년형을 선고받고 알카트라즈에 수감됐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마피아는 계속 성장해 더 큰 화근이 돼 갔다.

 

1933년 금주법 폐지로 더 이상 술이 돈이 될 수 없게 되자 마피아는 마약 밀매에 본격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들이 처음부터 마약에 손을 댄 것은 아니었으나 금주법 폐지 이후 과거 주류 밀매만큼 이익을 볼 수 있는 사업이 달리 없었다. 금주법의 연쇄반응이 마약의 창궐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1920, 밀조조직

1929, 몰수한 밀주 알코올통

 

3) 금주법 폐지

 

금주법 폐지는 뉴딜정책의 산물이다. 양조업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대공황이 몰아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서둘러 금주법을 완화시켰다. 금주법의 폐지로 루스벨트는 금주법에 반대하던 도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동시에 맥주와 포도주 등에 부과한 주세를 통해 새로운 수입을 창출하게 되어 뉴딜정책에 더욱 힘들 실을 수 있게 되었다.

 

1920, 워싱턴 DC, 금주법 시행에 항의하는 시위자들


1925, 뉴욕, 금주법 철폐 시위

1933, 뉴욕 타임스 스퀘어, 금주법 폐지된 날 거리로 나온 시민들

1933 12 5, 미국 금주법 폐지 당일 술집 전경

금주법 폐지를 환영하는 시민들

 

4)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금주령(禁酒令)의 사례가 없지는 않다. 동양 삼국도 다 그랬다. 특히 조선은 1392년 개국을 하자마자 금주령이 있었는데 태종 때는 거의 매년 그랬다. 풍류가 넘쳤다는 성종이나 황음무도(荒淫無道)했다는 연산군 때도 금주령이 자주 있었다.

 

특히 영조 34(1758) 내려진 금주령은 매우 엄격했다. 임금이 직접 백성들 앞에서 금주령을 공포했다. 모두 흉작 때문이었다. 기강을 다잡겠다는 이유도 없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곡물을 아끼고자 함이 주목적이었다. 술이 해악이기에 근본적으로 금지한다는 차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구적인 법이 아니라 한시적인 명령이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술의 항구적 금지는 시도하는 나라도 거의 없었을뿐더러 성공한 경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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