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3일

전쟁 중 친일 이승만의 자유당 창당

산풀내음 2016. 11. 12. 06:45

1951 12 23,

전쟁 중 친일 이승만의 자유당 창당

 

1공화국의 버팀목이었던 자유당(自由黨) 1951 12 23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창당됐다. 하지만 각기 다른 장소에서 두 개의 자유당이 동시에 출범, 시작부터가 파행이었다. 공화민정회(共和民政會)가 중심이 된 원내(院內) 자유당은 국회의사당에서, 이범석의 족청계(族靑系, 조선민족청년단 계통)를 중심으로 한 원외(院外) 자유당은 부산 동아극장에서 창당대회를 열어 이승만 대통령을 각각 의장과 당수로 내세웠다.

평소 자신은 특정 정파의 지도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온 이승만이 갑자기 생각을 바꿔 신당을 구상한 이유는 기존의 의석분포로는 재선이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52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1951 8월 15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정당을 조직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1951 8월 25 신당 조직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1951 8월 31 주중 대사로 있던 이범석이 귀국하고, 이승만이범석에게 자유당 창당을 맡겼다. 이것은 이범석의 탄탄한 조선민족청년단 조직 기반을 이용하고 여기에 가장 조직이 큰 5개 사회 단체(대한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총연맹, 대한부인회)를 자유당 산하 기간 단체로 편입시켰다.

 

철저하게 이승만에게 이용만 당한 이범석 장군, 마치 조봉암 선생이 이승만의 농지개혁에 이용만 당하고 죽임을 당한 꼴과 비슷하다.

 

1951 12월 17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원외 자유당)이 탄생했다. 그러나 1951 12월 23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자유당(원내 자유당)이 탄생했다. 원내 자유당은 장면을 리더로 하는 일파와 장택상을 리더로 하는 일파가 존재했고, 원외 자유당은 이범석을 부당수로 선출한다.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의 이중적인 구조는 후에 장면의 탈당, 장택상의 탈당 등 연이은 탈당 이후 이승만이 이범석을 평당원화 시키면서 강제로 일치시킨다.

 

대통령직선제와 양원(兩院)제를 골자로 한 이승만의 헌법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된다. 내각제를 선호하는 원내파가 반대하자 이승만은 직선제를 지지하는 원외파를 중심축으로 개헌작업을 추진한다. 개헌안이 야당인 민국당의 방해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이른바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7 4일 발췌개헌안(대통령 직선제)을 통과시킨다. 원외 자유당은 이승만의 지원을 받아 원내파를 흡수, 단일 정당으로 발돋움 한다. 이승만에게는 조국이 전쟁으로 풍전등하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정권을 유지해 평생 호하호식하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당시 자유당의 주도권은 이범석이 이끄는 족청계가 잡고 있었는데, 이에 대통령 이승만은 위협을 느끼고 거세(去勢)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개정헌법에 따른 그 해 8 5일의 정·부통령선거에서는 관권개입으로 부통령후보로 자유당의 공천을 받은 이범석이 낙선되고 무소속의 함태영이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다. 그 후 자유당은 이범석의 거세를 위하여 당수제(黨首制)를 총재제(總裁制)로 바꾸어 이범석의 부당수직을 박탈하였다. 이어 1953 9 12일 이승만의 노골적인 '족청계 축출과 당의 정화 및 재건' 지시에 따라 족청계는 이범석을 비롯하여 전원이 축출되었고, 이는 새로이 임명된 총무부장 이기붕이 실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