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4일

1.4 후퇴

산풀내음 2016. 11. 18. 19:17

19511 4,   1.4 후퇴

 

패주하는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군이 1950 10 4일 참전을 결정하고 10월 14일부터 한국전에 참전, 10 25일 처음으로 국군 2군단과 대규모로 접전(온정리전투)을 벌였다. 그리고 11 11일 중국 외교부는 중국 군의 참전을 공식으로 시인했다. 중국 군의 개입으로 아군의 전세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중국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11 24일 맥아더 사령관은 전쟁조기 종결을 위해 유엔군의 총공격을 명령했으나 유엔군은 청천강 유역에서 중국 군에게 대규모 역습을 당해 11 26일부터 패퇴를 거듭했다.

 

소위 평양철수작전에 따라 12 4일에 연합군은 평양에서 철수했고 그 결과 12 6일에 인민군과 중공군이 평양을 다시 점령하였다. 12월 말 서부전선에서는 임진강선까지 밀렸으며, 동부전선에서는 12 24일 흥남 철수를 단행하였다.

 

100,000명 이상의 유엔군과 17,500여 대의 탱크, 각종 중화기 및 차량, 350,000톤 이상의 군수물자의 성공적인 철수뿐만 아니라 100,000명의 북한 피난민을 구출한 흥남 철수작전.

 

1950 12월 하순 38선 일대까지 남하한 중국군과 북한군은 12 31일 자정을 기해 일제히 38선을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동원된 적의 병력은 중국군 17만 명, 북한군 6만 명1951년 1월초 중공군은 주공격 방향을 서울에 두고 철원, 연천 쪽에서 4개 군을 앞세워 서울을 압박하였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서쪽으로부터 터키여단, 미제25사단, 영연방 제27여단, 국군 제1사단 등을 배치하였으나,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북한공산군의 중동부전선 돌파로 서울방어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M.B. Ridgway) 중장은 서울이 중공군의 포격권에 들기 전에 주력의 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 서울에서 60㎞ 남쪽의 오산과 삼척까지 후퇴하도록 결정하였다서울 시민들에게 공식 소개령이 떨어진 건 흥남 철수가 완료되던 1950 12 24일이었다. 그를 전후하여 서울을 탈출한 것은 80만여 명. 당시 서울 인구 1백만 잡고 8할이 서울을 떠났던 셈이다. 서울 인근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의 경우 1 3일쯤 되면 거의 유령도시에 가까웠다고 한다. 1951 1 2일 마지막 피난 열차가 서울을 떠났다. 열차 안은 콩나물 시루 같았고 열차 지붕 위에까지 빽빽하게 사람들이 들어찼다.

 



한강 얼음 위로 피난

 

그리고 1951 1 4, 이른바 ‘1·4후퇴인 이날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후퇴했고 유엔군도 서울 철수를 완료했다. 그러나 이번의 후퇴는, 6·25당시의 경우와는 달리, 미리 준비되어 있던 유엔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으며 중국군은 다음날인 1 5일 서울로 진입했다. 중국군은 1 7일 수원, 1 8일 오산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유엔군은 오산장호원제천영월삼척 선에서 다시 반격전을 시작했다.

 

1 15일에 시작된 유엔군 반격작전의 중점은 북쪽으로 진격하기보다는 적 병력을 대량 살육하는 이른바 도살작전에 있었다. 유엔군이 반격작전을 시작하자 공산군은 1개월 만에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작전으로부터 2개월 후인 3월 중순 서울을 다시 수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