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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적, 전범 히로히토 사망

산풀내음 2016. 11. 20. 08:45

19891 7,

인류의 적, 전범 히로히토 사망

 

히로히토(裕仁, 1901 4월 29 ~ 19891월 7) 일왕이 1989 1 7일 오전 633분 투병 111일만에 87세를 일기로 사망함으로 1926년부터 시작되어온 쇼와(昭和)시대가 63년 만에 막을 내렸다. 부왕인 다이쇼(大正)의 뒤를 이어 지난 1926 12 25 26세로 즉위한 히로히토는 일본의 상징적 존재로, 한때는 유일신으로 국민 위에 군림하기도 했으며 특히 한국에 대한 일제식민통치 35년 중 후반 20년이 그의 재위기간이었다.

 

 

1901년 태어난 히로히토의 이름은 중국 격언에서 유래한 '풍요해지면 백성이 평안하다.'란 뜻이다. 히로히토의 아버지 요시히토는 수백 년에 걸친 왕실 근친혼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뇌막염에 걸렸고, 끝내 황실의 낙오자로 전락했다.

패전을 앞두고 히로히토가 걱정한 것은 신하도 백성도 아니고 '국체'(national polity)를 상징하는 '3종 신기'(神器; , 곱은 옥, 청동거울)의 안위였으며, 그가 끝까지 지키고자 한 국체는 나라의 제도나 정치 체제가 아니라 바로 황조황종(皇祖皇宗)의 후손인 자기 자신이었다.

 

일본의 정치 지배층은 천황이 침략전쟁으로 자기 나라 인민과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한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하면서, '정치에 대한 책임'을 온 국민이 나눠 짊어져야 할 '패전 책임'으로 바꿔 놓았다. 일본 국민은 도리어 천황 앞에서 신하로서 패배의 책임을 져야 했다. 타인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지위를 결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점에서 그는 근대의 군주 가운데 가장 솔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Prince Hirohito and British Prime Minister Lloyd George, 1921


1차대전의 주요 전장을 둘러보던 히로히토가 프랑스를 방문해 대포에 올라탔다.

 

히로히토는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난 후에도 1946도쿄 전범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이는 독일 나치의 수장 히틀러가 자살(아직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로써 전쟁의 책임을 마무리한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모습이다. 히로히토가 기소되지 않은 것은 일본 육군과 해군이 주도한 침략전쟁에서 그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끌려간 힘없는 군주였을 뿐이라는 게 이유였다. 이것이 현재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 하버드대 박사로 30여 년간 일본사를 전공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 교수도 지낸 허버트 빅스 미국 빙햄튼대 교수는 이 같은 '상식'은 완전히 허구라고 지적한다. 그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그리고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침략전쟁 확대 과정에서 히로히토는 전쟁에 동의하고 사후 재가하거나 주요 국면에서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목숨을 구걸 중인 일본 왕, 히로히토와 맥아더.

재판을 위해 점령군 미군에 체포되어 극동군사재판정에 호송되는 일본 악질전범들. 여기에 히로히토는 빠져 있다.

 

만주사변은 처음엔 히로히토의 재가 없이 일어났다. 1931 9 18일 관동군은 일본이 운영하는 남만주철도 노선을 일부러 폭파하는 자작극을 통해 만주 침략을 본격화했다. 사건 직후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는 독단적으로 공격 명령을 내려 주요 전략 거점들을 장악했다. 이어 관동군은 조선 주둔군이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증원부대를 보내게 해달라고 도쿄 참모본부에 요청했다이 문제에 대해 3일 후 도쿄에서 내각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조선 주둔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 역시 독단으로 부대에 국경을 넘을 것을 명령했다. 참모총장 가나야 한조(金谷範三)는 즉시 히로히토에게 현지 사령관이 재량권을 발휘해 이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대원수'인 일왕의 통수권을 침해한 일에 대해 히로히토는 "이번에는 어쩔 수 없으나 앞으로 주의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계속된 승전보에 고무된 히로히토는 "혹시 필요하다면 나는 사건이 확대되는 데 동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듬해에는 '칙어(勅語)'를 통해 "황군(皇軍)의 위력을 나라 안팎에 선양했다"고 관동군을 칭찬하고, 이후 수년 동안 만주사변에 공적이 있는 군인 및 관리 3000명에게 훈장을 주고 승진시켰다.

 

중·일전쟁은 히로히토가 적극적으로 주도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계기가 된 노구교(蘆溝橋)사건은 만주사변 때처럼 현지 부대장의 독단으로 발발했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이를 사후 재가하고 "중국군을 응징하고 주요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임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국제법에 금지된 화학무기 사용을 지시한 것도 히로히토였다. 그는 1937 7 28일 화학무기 사용을 처음 허가했고, 궁중에 설치한 '대본영'을 통해 독가스 사용을 375차례 이상 허가했다.

 

하와이 진주만 공습은 히로히토의 작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히로히토는 1941 10월 강경한 대미(對美) 전쟁론자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수상에 임명했다. 개전(開戰)을 반대했던 전임 수상 고노에(近衛)는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총리대신으로 폐하께 개전의 불리함을 말씀 드리자 그것에 찬성하셨다가, 다음날 어전에 나가자 약간 전쟁 쪽으로 기울어지셨다. 그 다음에는 더욱 전쟁론 쪽으로 기울어지셨다. 유일한 버팀목이신 폐하가 이렇게 나오니 도저히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히로히토가 종전(終戰)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영국식 입헌군주처럼 자신을 포장할 수 있게 된 것은 도쿄에 진주(進駐)한 연합국총사령부(GHQ) 맥아더 사령관의 점령정책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모든 일본인은 천황을 신뢰하고 있으므로 심리전에서 그들의 신뢰를 역이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맥아더는 워싱턴에 "천황은 일본인 통합의 상징이다. 그를 기소하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천황을 망가뜨리면 족히 100만 군대가 필요할 것이고, 그 군대를 무기한 유지해야 할 것이다"고 보고했다.

 

이후 히로히토는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를 설파하고 다녔고 전쟁 책임론이 불거질 때마다 오히려 종전의 공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방문 때는 디즈니랜드에서 미키마우스와 함께 웃는 모습을 연출하며 인자한 평화애호자로서 이미지를 굳혔다.

 

쇼를 하고 있는 히로히토

 

출처 : 조선일보, "일왕 히로히토는 비겁한 戰犯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0/08/20101008021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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