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11일

호남선(대전-목포 간) 완공

산풀내음 2016. 11. 20. 20:53

19141 11,

호남선(대전-목포 간) 완공

 

시작은 프랑스의 휘브릴사()였다. 휘브릴사는 무슨 욕심이었는지 휘청거리는 나라 조선에 들어와 1896년 서울에서 의주까지의 철도 부설권을 따냈다. 그리고는 9월 서울에서 목포까지 내달릴 '경목선' 부설권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이 철도는 조선의 곡창지대인 논산평야와 호남평야를 관통하는 알토란 같은 노선이었고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한다. 그런데 경부선을 따낸 일본도 이 노선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경목선 만큼은 우리 힘으로 깔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였다. 마침내 2년 뒤 직접 부설할 것을 결정하고 경목철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자금 사정으로 1904 6월 부설권을 민간업자에게 넘겨야 했고 철도 이름도 경목철도에서 호남철도로 바뀌었다. ‘호남(湖南)’에서()’는 금강의 옛 이름인호강(湖江)’을 가리킨 데서 유래한다.

 

민간에게 넘어간 뒤에도 부설권은 한국인들로 이뤄진 '호남철도 주식회사'가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실제 공사에 들어갔지만 만, '국방상 중대한 기능을 하는 철로 건설을 개인에게 불하함은 곤란'하다는 일본의 개입으로 좌절하고 만다. 이제 철도의 완성은 일본의 몫이었다. 일본은 호남선을 시급히 완성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한국 최고의 곡창지대에서 나오는 쌀이었다.

 

38개월 동안 구간 별로 시차를 두고 개통해온 대전-목포간 철도 노선이 1914 1 11일 전북 정읍과 광주 송정리를 잇는 9번째 철도구간이 마지막으로 완공됨으로써호남선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이어졌다.

 


호남선 개통 당시 군산역

이리역

1940년대 통학기차의 모습

 

경부선과 경의선이 정치·군사적인 목적으로 부설된 것과 달리 호남선은 경제적 수탈이 목적이었다. 곡창지대에서 나온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호남선은 차별도 심했다. 일단 운행 횟수가 적었고, 여객의 수송보다는 쌀 같은 화물 수송이 중심이었기에 시설이 남루했고 기차 자체도 낡은 것이 투입됐다. 결정적으로 경부선, 경의선은 일본인도 많이 이용했지만 호남선은 상대적으로 '조센징 투성이'의 기차였다.

근일 철도에서 하는 일을 보면 아무리 지선이라도 경원선과 호남선에 대하여는 학대가 비상하여 똑같은 기차삯을 내는데 어찌하면 철도길이 다르냐고 이와 같이 차별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자연히 승객의 마음에 일어난다.”는 것이 1920년대 동아일보 기사이니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광복 후 호남선은 가난을 등지고 도시로 상경하는 시골 사람들을 태운 ‘이농열차’ 겸 ‘이별열차’였다.

 

호남선은 석탄을 이용하는 증기기관차로 시작해 1950년대 후반 디젤기관차로 교체됐고, 완행열차(비둘기호) 1998 121일까지 호남인들의 삶과 애환을 싣고 달렸다. 1999 6월에는 ‘통근형 통일호’만 남긴 채 ‘여객형 통일호’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2004년에는 고속열차(KTX)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1914년 단선으로 개통된 지 90, 복선화 공사가 시작된 지 36년 만의 일이었다.

 

1931년 전주-군산간에 선보인 디젤엔진 기차

호남 KTX 개통

 

1956년 발표한 안정애의 ‘대전 부르스’는 그 당시의 대전역 풍경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안정애의 대전 부르스,

https://www.youtube.com/watch?v=ca585Sx-XZ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