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12일

의열단원 김상옥 열사 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산풀내음 2016. 11. 22. 20:38

19231 12,

의열단원 김상옥 열사 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의열단원 김상옥(1890 1월 5 ~ 1923 1월 22) 열사가 1923 1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일경과 매일신문 기자 등 7명이 다치거나 사망했으며 건물 일부도 파괴됐다.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상옥은 일찍이 아버지를 잃어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낮에는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를 했다. 1910년 경성영어학교에 입학해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기르며 물산장려운동과 야학운동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김상옥은 영덕철물상회라는 철물점을 운영하였는데 종업원을 50명이나 둘 정도로 사업은 번창했다. 안락한 삶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3.1운동 이후였다. 그는 3.1운동 당시 만세를 외치던 여고생을 칼로 내리치려는 일본군경을 저지 및 폭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군경의 검을 탈취하여 자신이 보관하였다. 당시 탈취한 검은 현재 독립 기념관에 전시 중이다.

 

3.1운동 당시 한국 여학생을 해치려고 한 순사의 검

 

1919 4월 비밀결사단체 혁신단을 조직,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1920 8월 일본 총독 사이토 암살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11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는 각오를 남기고 2년여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원수의 소굴이었다. 숱하게 많은 이들이 그곳 취조실에서 몸이 부서졌고, 이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일본 정예 경찰력이 집결해 있던 일종의 심장부였다. 그런데 1923 1 12일 밤 8시 일제의 간담을 내려 앉히는 일이 벌어진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종로경찰서

 

원래 김상옥 일행은 종로경찰서 앞을 사이토 총독이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김상옥의 동료가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일이 틀어지자 김상옥이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폭탄 성능도 시험할 겸 원한에 사무친 종로서 경무계 창문에 대고 폭탄을 던져 버린 것이었다.

 

현장을 벗어난 김상옥은 사건 후 후암동 매부의 집에 숨었다. 서울역 근처에 은신했다가 서울역에 행차하는 사이토 총독을 때려잡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집에 기거하던 여자의 오빠가 하필이면 종로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끄나풀의 밀고로 종로경찰서 형사대가 출동했다. 선봉은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 다무라였다. 14명의 경찰이 집을 에워싼 상황에서 김상옥은 놀라운 사격 실력을 발휘하면서 현장을 빠져나갔고 다무라는 김상옥에게 사살되었다.

 

당시 김상옥 의사가 사용하신 권총

 

이후 김상옥은 금호동의 안장사, 효제동의 이혜수 집, 홍제동의 동지 집을 전전하며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결국 일본 경찰은 김상옥의 냄새를 맡고 경기도 경찰 부장의 지휘 아래 무려 천여 명의 무장 경관을 동원하여 일대를 에워 쌓다.


결국 1 22일 새벽, 김상옥은 홍제동에서 끈질기게 뒤쫓아온 경찰 수백 명에게 포위된 채 격전을 벌이다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자신의 총으로 자결했다. 일경 15명을 살상한 뒤였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만 11군데에 이를 정도로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며 일제하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열 투쟁 가운데 가장 장렬하고 대표적인 항일 시가전이었다.

 

1년 뒤 한식 날을 전후하여 어느 동아일보 기자가 김상옥의 무덤을 찾았다. 그 무덤에는 망자의 주소가 중국 상해로 적혀 있었다. 평소에 그는 죽어서도 혼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할 것이니 행여 죽으면 주소를 중국 상해라 써 줄 것을 원했던 것이다. 기자 앞에서 어머니는 이렇게 통곡했다고 한다.

 

“너무 잘나서 그랬는지 못나서 그랬는지 그 일(독립운동)로만 상성을 하다가 그만 그 지경이 되었습니다. 죽던 해에도 몇 해 만에 집이라고 와서 제 집을 들어앉지도 못하고 거리로만 다니다가 죽었습니다.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을 못 해 먹이고 그렇게 죽은 생각을 하면… 그냥 거기에 있으면 생이별이나 할 것을 왜 와서 영 이별이 되었느냐?”

 

1923 3 16일자, 김상옥 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동아일보, 보도는 의거 후 2달이 지난 후에나 되었다,

임시정부 요인과 중국 정부가 발표한 추도문